방산전문 매체 '글로벌디펜스뉴스'는 '한국방위산업학회(회장 채우석)'가 지난 2년간 집필한 '방위산업 40년, 끝없는 도전의 역사' (이하 '방산백서')를 전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하여 방위산업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래의 전문은 '방위산업 40년, 끝없는 도전의 역사' (이하 '방산백서')의 원문이며, 한국방위산업학회의 동의 하에 게재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자주국방을 위해 방산제품 개발에 참여한 민·관·군·산·학·연 관계자와 방산제품 시험 도중 부상 당하거나 순직하신 모든 분들께 격려와 위로의 박수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제1부 요약>
제1부에서는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태동부터 현재의 방위산업에 이르기까지 방위산업과 관련된 주요사건과 이슈 중심으로 정리했다. 우리나라 방위산업은 1960년대 말부터 있었던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과 주한미군 철수 등 한반도 안보환경의 불안정을 극복하고 자주국방을 실현하려는 의지와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창설하고 이어 한국의 최초 방위사업이라 할 수 있는 번개사업과 1차 율곡사업을 시작하여 짧은 기간에 미사일까지 개발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기반이 된 중화학공업은 곧 방위산업을 위해 육성되었고 방위산업과 함께 발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미사일 개발이 중단되고 국방과학연구소가 축소되는 등 시련의 과정이 있었으나, 2・3차 율곡사업을 통해 방위산업의 기반이 다져지고, 한국형 정밀무기 개발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었다. 율곡감사는 방위사업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고, 각 정부별로 이루어진 국방개혁과 획득제도 개선 및 방위력개선사업을 통해 방위산업은 내실을 다지면서 첨단화를 지향해왔다. 2006년 방위사업청의 설립으로 방위산업은 개방과 경쟁의 장(場)으로 진입하는 변혁을 겪게 되었고 국제경쟁력 강화를 모색하는 과정에 있다.
Chapter 3 방위산업의 시련과 도전
2. 미사일 개발
미사일 개발의 시작
1971년 12월 26일 박 대통령은 친필 ‘극비’ 메모로 비밀 프로젝트를 추진하라는 지시를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에게 내렸다. 다음날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국방과학연구소 구상회 박사와 공군 작전참모부장을 청와대로 불러 대통령의 친필 메모를 건네줬다. 메모에는 “1단계로 1975년까지 200km 사거리의 국산 지대지유도탄 개발”이라는 요지의 지시가 적혀 있었다. 박 대통령은 “단거리 미사일은 수입해서 쓰면 된다. 중・장거리를 개발하라”고도 지시했다. 미국도 사거리 600km의 지대지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10년이나 걸렸는데, 관련 기술과 인력이 전무(全無)한 상황에서 4년 안에 국산 지대지미사일을 만들어내라는 명령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밀서를 받은 국방과학연구소는 미사일 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유도탄 관련 연구자는 국방과학연구소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연구진 수십 명, 그리고 공군사관학교 교수진이 전부였다. ‘미사일기술연구반’이 국방과학연구소에 설치되고 공군에 ‘미사일전술반’이 설치되었다. 국방부의 유도탄 개발에 대한 정식 공문은 9172년 4월 14일 국방과학연구소에 시달되었는데, 보안을 위해 ‘항공공업육성계획’이라는 위장사업명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5월 1일 국방과학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국방부, 중앙정보부가 참여하는 미사일개발단이 ‘항공공업개발계획단’이라는 명칭의 위장단체로 발족되었다.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구상회, 서정욱, 박귀용,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이경서, 정선호, 손성재, 김연덕, 한국과학기술원에서 김길창, 윤덕용, 육군에서 김정덕, 해군에서 최호현, 공군에서 홍재학 등 12명이 참여하여 연구계획단이 구성되었다. 단장은 심문택 소장이 직접 맡고, 간사는 이경서 박사가 맡았다. 동부이촌동의 한 아파트에 작업 장소를 마련했다. 4개월간 숙식을 같이하며 작업한 상근요원들은 김정덕, 박귀용, 이경서, 최호현, 홍재학, 구상회였다. 이경서 박사가 총괄, 박귀용 씨는 추진기관, 기체는 홍재학 박사, 유도조종은 최호현 박사, 시험평가는 구상회 박사가 맡았다.
미사일 개발에 관한 자료 부족에 허덕이던 중에 구상회 박사는 때마침 미 국방부로부터 방위산업교육을 위한 초청장을 받게 된다. 하루는 심문택 소장이 구 박사를 불러서 가보니 미국 기술지원단장 하딘이 와 있었다. 그는 “한국방위산업의 역사가 짧고 연구개발 규정 및 절차가 정립되어 있지 않아 미국이 기술 지원하는 데 지장이 많다. 앞으로 국방과학연구소가 독자적으로 무기를 개발할 경우 지금처럼 주먹구구식으로 하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나는 국방과학연구소가 연구개발에 대한 자생력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들과 연구개발 업무를 협조하는 데에도 용어의 정의와 개념이 달라 어려움이 많다. 우리가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들에게 무기 연구개발에 대한 절차와 용어를 교육할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연구원 한 사람을 미 국방부 및 육・해・공군 연구소에 보내 견학시켜 국방과학연구소 직원들에게 전수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 생각하여 구 박사를 미 국방부에 추천했는데, 어제 초청장과 여행일정이 왔다. 항공료와 숙식비 등 모든 경비는 미국 정부가 부담한다”고 말하면서 초청 관련 서류와 비행기표를 내놓았다.
구상회 박사는 1972년 5월 16일부터 7월 4일까지 미국 방산 연구소들을 견학했다. 그중 앨라배마주 헌츠빌(Huntsville)에 있는 미 육군 유도탄연구소 위주로 방문일정을 잡았다. 그곳에서 맥다니엘 연구소장과 월불 체계실장의 도움으로 유도탄 연구 및 시험장비 등의 내역, 제작회사 및 예상가격, 추진제와 유도조종장치 및 기체 등을 시제하는 데 필요한 원료, 부품의 공급회사 및 단가, 유도무기 연구소를 건설・운영하는 데 필요한 인력과 조직 등에 관한 약 800쪽 분량의 유도탄 개발에 필요한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사일 개발에 필수적인 실물 관성항법장치 하나도 선물로 받았다. 이 방문은 구체적인 유도탄개발계획 수립과 실행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미사일 개발 방식에 있어서 개발 총괄책임자였던 이경서 박사와 오원철 경제 제2수석비서관의 견해가 조금 달랐다. 이경서 박사는 바로 180km급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기술적으로 개발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북측이 서울에 직접 도발할 경우, 우리의 수단이 무엇이냐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항공기로 대응하는 것은 확전의 위험이 크고, 유도탄으로 대응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에 장거리 미사일이 필요하며, 또한 나이키 허큘리스(Nike-Hercules, NH)가 있기 때문에 이를 모델로 지대지미사일을 개발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오 수석의 생각은 함대함미사일 같은 작은 미사일 개발부터 먼저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견 충돌이 길어졌기 때문에 각 방안의 장단점을 모두 포함하여 분석한 후 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박 대통령은 장거리미사일개발계획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방안은 모두 계획에서 삭제해버렸다. 그리고 미사일 개발에 대해서는 이경서 박사가 모든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개발을 수행하도록 백지위임을했다.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방위산업을 총괄・보좌하되, 미사일 개발에 대해서는 간여하지 않게 되었다.
1974년에는 유도탄 개발을 위해 대전에 연구소를 착공하여 ‘신성 농장’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시로 공사 현장에 방문하여 함께 밥을 먹고 독려할 정도로 유도탄 개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75년부터 본격적인 사업이 시작되었는데, 미사일 개발을 위해서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기술은 3가지였다. 미사일 설계기술, 추진제 제조기술132 및 관성항법장치(INS) 기술이었다.
미사일 설계기술의 획득
미사일 개발에 필수 핵심기술인 미사일 설계기술, 추진제 제조기술, 관성항법장치(INS) 기술을 확보하는 것은 구름을 잡는 것과 같았다.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미사일 설계기술과 추진제 제조기술은 뜻밖에도 감시가 가장 심했던 미국에서 획득하게 되었다. 우리 공군이 운용 중이던 지대공미사일인 나이키 허큘리스의 원(原)개발자인 미국의 맥도넬 더글러스(McDonell Douglas)사가 1975년 봄에 뜬금없이 우리 국방과학연구소에 나이키 허큘리스(NH) 지대공미사일을 지대지미사일로 개조하고 사거리도 240km로 연장해주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사실 국방과학연구소는 백곰 미사일의 개발을 나이키 허큘리스를 기본 모델로 삼아 모방개발하려던 참이었다.
당시에 미국에서는 방위산업이 전체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맥도넬 더글러스사도 극심한 경영난으로 도산 직전까지 몰린 상태에서 해외에서 활로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맥도넬더글러스사의 구체적인 제안내용은 2,000만 달러에 기술이전 없이 사거리 240km의 지대지미사일로 개조하는 설계만 해주겠다는 것이고, 양산 비용은 별도였다. 국방과학연구소는 바로 승낙했다. 다만 조건을 조금 바꾸어서 예비설계(Preliminary Design)는 공동연구로 하고, 나머지 2・3단계의 본 설계는 맥도넬 더글러스사가 전담해서 하는 조건이었다. 맥도넬 더글러스사는 이 제안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고, 예비설계에 180만 달러, 본 설계에 2,000만 달러로 계약하고, 미 국방부와 국무부에승인을 얻었다.
기술이전 없이 설계만 제공하는 것이라고 하니 미 정부에서도 크게 고민하지 않고 설계판매허가를 내주었던 것이다. 국방과학연구소에서는 이경서 박사를 포함하여 15명이 미국으로 가서 맥도넬더글러스사 연구원 20명과 함께 예비설계의 공동연구에 참여했다. 이경서 박사에 따르면, 이때 풍동실험자료, 유도조종자료 등 미사일 설계 및 개발에 관한 기술과 관련 비밀자료들을 거의 모두 보았고, 이때 대부분의 설계기술을 확보했다고 한다. 공동연구였기 때문에 NH 관련 기술자료는 모두 볼 수 있는 명분이 있었고, 맥도넬더글러스사 직원들이 막상 공동연구하는 단계에 들어가서는 기술 토의를 활발하게 하면서 기술관리도 그렇게 치밀하게 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복사기를 구해 숙소에 두고는 밤마다 상당수의 자료를 가지고 나와 복사하는 것이 일이었다.
1976년 예비설계 단계의 공동연구가 끝나고 맥도넬 더글라스사에 파견된 연구진들이 귀국하면서 그동안 습득한 기술력으로 미사일 독자설계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목적이 달성된 것으로 보고 국방과학연구소는 돈이 없다는 핑계로 맥도넬 더글라스사와 2,000만 달러짜리의 본 설계 계약은 더 이상 진행시키지 않았다. 1976년에 충청남도 대덕에 미사일을 연구・제작하는 대전기계창을 설립했고, 1977년에는 태안에 미사일 성능을 시험평가하는 안흥시험비행장을 완공했다. 유도탄개발계획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최종 재가가 1974년 5월에 이뤄졌지만, 이렇듯 연구시험 및 생산시설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유도탄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76년부터였다.
추진제 제조기술 확보
1976년에 우리 정부가 미사일 독자설계를 결심했으나 당시 추진제로 액체연료를 사용할 것인지 고체연료를 사용할 것인지를 놓고 상당히 고민했는데, 액체로켓은 가격이 싼 대신 발사 전에 장시간 연료를 주입해야 하는 데 반해, 고체로켓은 언제나 바로 발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공군은 ‘미사일작전운영계획’에 따라 비상시 단추를 누르면 바로 발사할 수 있는 미사일을 원했고, 그리하여 추진제는 고체연료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추진제 제조기술과 설비가 없었다.
당시 미사일 추진제(연료) 제조에 필요한 300갤런 용량의 믹서 장비는 미국밖에 없었고, 프랑스에는 50갤런 용량의 믹서 장비밖에 없었다. 미국의 믹서 제조사와 구매합의를 하더라도 미 국방부에서 승인할리 없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구입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프랑스의 화약 추진제 회사인 SNPE사와 접촉하여 추진제 제조기술의 전수와 원료 및 장비의 판매를 요구했다. SNPE사는 기술은 전수해줄 수 있으나 설비는 판매할 수 없고 25갤런의 소형 시제품(prototype)만 제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2,000만 달러를 요구했다.
협상이 진행되는 중에 이경서 박사가 다른 일로 미국 LA에 출장을 갔는데, 마침 어느 교포로부터 “록히드(Lockheed)사가 추진제 시설을 매각하려고 하는데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이 박사가 귀가 번쩍 뜨여 곧바로 프랑스에 전화해 SNPE사와의 협상을 일단 중단시킨 뒤, 록히드사의 담당자에게 확인을 하니 사실이었다. 미국의 방산 여건이 악화되어 록히드사도 극심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이 박사는 바로 록히드사로 날아가서는 무조건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통보하고, 미 국무부의 수출허가 문제는 록히드사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다. 록히드사는 국무부의 허가를 받기로 약속하고 모든 시설매각에 합의했다. 시설과 장비 가격은 약200만 달러였다.
당시 우리의 경제 규모와 관료주의 조직 여건에서 2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은 당연히 국방과학연구소장에게 보고해 승인을 받아야 하고, 규모가 크기 때문에 청와대에도 보고해야 하는 사안이었다. 뿐만 아니라 외화 100만 달러 이상 지출되는 해외구매 계약은 한국은행에 보고해 한국은행 총재의 결재를 받아야 하는 사항이었다. 정상적인 절차를 따른다면 추진제 장비 확보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미사일 개발에 관해서는 이경서 박사에게 백지위임을 한 상태였고, 사업책임자인 이 박사가 해당 기술의 중요성과 기회의 절박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와의 상의도 없이 현장에서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미 국무부에서는 ‘기술 제공은 일체 불가하고, 오직 시설과 장비만 매각’하는 것으로 승인이 났다.그러고 나서 국방과학연구소는 프랑스 SNPE사와 추진제 기술 이전을 단계화하기로 하고, 1단계에서는 100만 달러에(260만 달러라는 말도 있다) 추진제 제조기술을 모두 전수받고, 2단계에서 2,000만 달러에 25갤론의 시제 믹서를 제공 받기로 계약했다. 그러나 1단계에서 기술을 전수받은 후에 더 이상 2단계로 계약은 진전시키지 않았다. 자금이 없는 데다가 믹서가 너무 소형이라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국방과학연구소는 미국 록히드사의 추진제 공장에 기술자를 보내어 모든 설비와 치공구 하나까지 빠짐없이 몽땅 뜯어서 배로 실어왔다. 그렇게 하여 300갤론짜리 미사일 추진제용 믹서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는 아무리 추진제 믹서를 추가 구입하려고 해도 결코 할 수가 없었다. 35년이 지난 2010년경에 LIG넥스원이 추진제 독자개발을 위해 믹서의 도입을 추진했을 때도 여전히 미국의 E/L에 걸려서 도입하지 못했다. 당시는 기막힌 시점에 다가온 유일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하늘이 도왔고, 박 대통령이 개발 책임자를 믿고 백지위임을 한 결과였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미사일 독자개발을 위해 가장 필요로 했던 미사일 설계기술과 추진제 제조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묘하게도 프랑스는 기술을 제공할 수 있는데 설비는 안 된다고 하고, 미국은 시설과 설비는 제공하되 기술은 안 된다는 상황에서 프랑스의 기술과 미국의 시설을 조합하여 완성된 기술을 확보한 것이다. INS 기술만 확보하지 못했으나, 개발하고자 하는 나이키 허큘리스는 RF(Radio Frequency)지령유도방식이므로 INS 없이 가능했다. 그러고 나서 국방과학연구소 산하 대전기계창 항공사업부가 독립기구로 정식 발족되었다.
미사일개발전략 및 미국의 압력
국방과학연구소가 채택한 미사일개발전략은 미국의 지대공 미사일인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을 완전히 지대지미사일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나이키 허큘리스는 2단의 고체추진기관으로 되어 있고, 그중에 1단 추진기관(booster)은 4개의 작은 추진기관이 클러스터(cluster) 형태로 묶여 있다. 유도방식은 2개의 레이더로 적 미사일과 우리 미사일을 추적하여 비행 중인 우리 미사일에 조종명령을 전달하는 지령유도방식이다. 나이키 허큘리스는 지대공미사일이지만 필요시 장거리의 허공에 가짜 목표를 설정하여 유도한 뒤 가짜 목표 근처에서부터 지상으로 하강하여 지상목표를 타격하는 지대지 옵션(option)이 있었다.
게다가 나이키 허큘리스는 우리나라에 실전 배치되었기 때문에 가장 쉽게 접근이 가능했다. 우리가 원하는 장거리 지대지미사일 개발의 모델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이 미사일은 개조하지 않아도 이미 평양을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미 CIA는 한국이 이를 350km 정도까지 사거리를 늘리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한국이 개발한 미사일은 비록 미국의 나이키 허큘리스 유도탄을 모방한 것이었지만, 유도탄의 외형만 같을 뿐 유도용 소프트웨어, 유도조종장치, 기체, 추진기관 및 탄두 등은 모두 개량하거나 새로 개발한 것들이었다.
진공관 회로를 모두 반도체로 바꾸고, 유도조종장치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꾸었다. 그러나 추적 레이더 장치는 개조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이 추적 레이더를 개발하는 작업은 미사일개발계획을 노출시킬 위험이 너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신 국방과학연구소는 “기존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에 쓰인 진공관 기술 대신 고체전자공학(solid-state electronics), 즉 반도체를 이용”하는 선택을 했다.
우리나라가 고성능 추진제 개발능력을 확보하자, 미국 정부는 깜짝 놀랐다. 미사일을 독자개발하려는 시도는 1975년~1976년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구상회 전 부소장은 “미사일 개발은 1950년대 미국이 개발한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을 참고하되 내부 추진기관, 전자회로 등을 대폭 개량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고 했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부터 주한미대사, 미 국방부 안보담당 차관보까지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해 개발 중단을 요구했다.”
한국의 추진제와 미사일 개발에 충격을 받은 미 국방부 안보담당 차관보가 직접 우리 정부에 “탄두는 무엇으로 할 것이냐? 탄도미사일 개발 뒤에는 핵개발을 할 것이냐”라며 항의하기도 했다. 미국은 미사일 사거리를 180km, 탄두 무게를 440kg로 제한하라고 국방과학연구소를 압박했다. 비밀해제된 CIA 보고서에 “1976년 5월이 되자 설계도 초안은 거의 완성되었다. 로켓 추진기관과 기체, 통제 시스템, 유도조종체계는 대폭 개량되거나 완전히 재설계 되었다”며 “국방과학연구소는 추진제와 생산기술에서 프랑스의 도움으로 소형화된 추진기관을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고 되어 있다.
“우리가 나이키 허큘리스에 그렇게 집착한 것은 미국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경서 박사의 말이다. 우리 정부는 미국이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 생산을 중단하기 때문에 우리가 독자적으로 나이키 허큘리스의 정비유지기술을 확보해야 한다는 핑계로 미국 정부의 항의를 무마시키기는 했으나, 미국 정부의 의심은 날로 깊어져 갔다. 미국 정부는 CIA요원을 대전기계창에 상주시키겠다며 압박했으나, 우리 정부는 이를 묵살했다.
마침내 하늘로 치솟은 백곰
미사일 개발은 중단 없이 진행되어 1978년 4월 11일 ‘백곰’ 미사일의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1차 및 2차 시험발사는 비행경로이탈 통제를 너무 촘촘히 하는 바람에 미사일이 중간에 추락하여 실패하고, 두 달 뒤 6월 24일에 실시된 3차 및 4차 시험발사는 성공했다. 이어서 5차, 6차 시험발사도 성공하고, 7차에 점화장치 문제로 실패했으나 8차에는 성공하면서 9월 16일 국산화율 90%라는 대한민국이 직접 만든 최초의 유도탄이 개발되었다.
1978년 9월 26일 대한민국 정부는 ‘세계 일곱 번째 미사일 개발국’이라고 선포하고 충남 서해안 안흥시험장에서 귀빈들을 초청하여 국산 미사일 1호 ‘백곰’의 시험발사를 공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곰’은 엄청난 불기둥을 내뿜으며 하늘로 치솟았다. 백곰은 사거리가 180km였다. 다음날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남한 유도탄의 원시적인 포물선 비행방식과 정밀도 부족”을 지적하며, “핵개발과 연관되어 있다”라고 논평했고, 9월 29일 소련 국방성은 남한의 핵개발을 경고 하기도 했다. 미국 카터 행정부는 한국이 미사일 개발을 선포하자 한미미사일협약을강조했다. 미국은 7명으로 구성된 시찰단을 파견했고, 우리나라의 미사일 개발기술을 높이 평가하면서 기술제공국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으나 한국 측은 독자개발을 강조하며 미국의 질문을 회피했다.
‘백곰’ 시험발사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며칠 뒤에 위컴(John Wickam) 미 8군 사령관이 합참의 임동원 대령의 안내로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했다. 미사일 개발이 공개되었으니 국방과학연구소의 문을 연 것이다. 그때 위컴 대장과 이경서 박사를 비롯한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자들 사이에 한국이 왜 미사일을 개발해야 하는지에 대해 5시간 동안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들은 “북한이 도발할 경우 항공기로 대응하는 것은 확전 위험이 커서 안 된다. 유도무기로 대응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라는 논리로 대응했다. 위컴 대장은 토론을 마치면서 “군인의 입장에서는 당신 말이 맞소(As a soldier, I totally agree with you)”라고 언급했다. 주한미대사관은 이를 두고 위컴 대장에게 엄중히 경고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관성항법장치(INS) 기술의 확보
로켓이 성공적으로 개발되자, 국방과학연구소는 또다시 하나의 미사일을 개발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백곰’ 미사일(K-1)의 단점을 보완하고 관성유도로 작동하는 K-2(현무) 유도무기였다. 관성항법장치(INS; Inertial Navigation System)는 미사일의 위치를 유지시켜주는 장치이다. ‘백곰’ 미사일의 항법장치는 RF지령유도방식인데, 이는 유도탄에 무선장치를 달고 비행하는 동안 지상통제소에서 레이더를 통해 미사일의 위치를 추적하면서 무선교신을 통해 목표를 찾아가게 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현대 미사일은 INS가 기본이다. 무선교신이나 지령유도가 필요 없이 자체적으로 위치를 유지하면서 목표를 찾아간다. NIS 방식도 기계식, 레이저 방식, 광섬유방식, GPS 방식 등으로 고도화되어 있으나, 당시는 기계식 기술밖에 없었다. 우리나라가 가장 간단한 방식인 기계식 INS를 개발하려면 15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래서 INS를 구매하기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녔는데 구할 수가 없었다. 미국이 수출금지품목으로 강력하게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경서 박사가 영국의 페란티(Ferranti)사를 방문했을 때 INS 기술을 판매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페란티사는 라디오와 항법장치 등으로 유명한 회사이다. 이 박사는 지체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INS 기술에 대한 구매를 결정했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이었다. 이 박사는 얼마 전에 최형섭 과기처 장관이 프랑스 상무부 장관과 핵재처리시설의 도입을 성사시키고도 이를 알게 된 미국의 압력으로 무산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박사는 영국이 우리에게 INS 기술을 판매할 경우 미국에 그 사실을 통보해야 할 의무가 있는지를 물었다. 페란티사는 통보 의무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 최대한 늦추어서 통보할 수 있는 기간이 얼마냐고 물었다. 6개월 이내에 통보해야 한다는 답변이 왔다.
그러자 이 박사는 2가지 조건을 걸었다. 첫째는 최대한 늦추어서 6개월이 끝나는 시점에 미국에 통보할 것과, 둘째는 그 6개월 기간 동안에 한국의 기술자에게 기술이전을 완료한다는 조건이었다. 페란티사는 승낙을 했다. 그래서 국방과학연구소는 즉각 20명의 연구원을 영국으로 보내 6개월 동안 교육을 받게 하고 INS 기술을 완전히 이전받았다. 이 박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만약 박 대통령이 개발 책임자에게 전폭적인 권한 위임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한미미사일협정
1979년 7월 당시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이 탄도미사일 개발을 중단하라는 권고 서한을 노재현 국방부 장관에게 보냈다. 이에 대해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1979년 9월에 우리의 미사일 개발 범위를 탄두중량 500kg 이내, 사거리 180km 이내로 제한하겠다는 입장을 서한으로 전달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미사일개발 자율규제 서한’이다. 우리 측의 일방적이고 자율적인 지침을 통보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쌍방 협정과 같은 구속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통상 ‘한미미사일협정’으로 불린다.
1990년 2월 우리 측의 현무 미사일 사거리가 180km를 훨씬 넘는 것으로 생각한 미국 측이 우리 측의 기술자료와 검증을 요구하며 압박하자, 1990년 10월 8일 당시 외무부 북미1과장 명의로(송민순 서기관, 외교통상부 장관 역임) 이 미사일개발 자율규제지침의 준수를 재확인하는 동일한 내용의 서한을 미 국무부에 보냈다.
그 후 1995년부터 미국 측과 사거리가 연장된 미사일 개발에 대한 협상을 추진하여 2001년 1월 17일에 합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비공개의 ‘미사일 정책 선언’을 미국에 통보했는데, 유도탄의 탄두중량을 500kg으로 그대로 두고 사거리를 300km로 연장하는 내용이었다. 다만, 순항미사일 및 무인항공기(UAV)의 ‘연구개발’은 탄두중량 500kg에 사거리를 무제한으로 할 수 있게 했다. 완성된 시제품을 제작・생산・보유할 경우는 여전히 사거리 300km, 탄두중량 500kg까지로 제한하되, 탄두중량을 줄이면 사거리를 늘릴 수 있다는 ‘트레이드 오프(Trade Off)’ 방식을 적용했다.
탄두중량을 500kg 이하로 줄일 경우 사거리 300km 이상도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2년 10월 7일에 미사일 지침을 개정했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새로운 미사일 정책 선언’의 핵심내용은 탄도유도탄의 탄두중량 500kg은 그대로 두되, 사거리는 800km로 늘린 것이다. 트레이드 오프를 적용함에 따라 사거리가 300km 이내이면 탄두중량 2톤까지도 가능하다. 순항미사일의 경우는 탄두중량 500kg 이하에서는 사거리를 무제한으로 하고, 사거리 300km 이내에서는 탄두중량의 제한을 없앴다.
무인항공기의 경우는 항속거리 300km 이내에서는 탑재중량 제한을 두지 않고, 300km 이상일 경우에는 탑재중량을 2.5톤으로 제한한다(즉, 탑재중량이 2.5톤 이내일 경우 항속거리는 무제한). 이는 한반도 전역에서 사실상 제한 없는 미사일 작전이 가능하며, 글로벌 호크(Global Hawk)(탑재중량 2,268kg) 같은 고고도 무인정찰기의 개발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 전편 - 핵개발 >
< 다음편 - 전두환 정권과 국방과학연구소의 구조조정 >
< 연 재 순 서 >
PART 1 방위산업의 역사 / 서우덕 •16
Chapter 1 방위산업이 태동되기까지 •19
1. 1・21사태(김신조사건)•19
2. 미국 푸에블로호 납치사건•21
3.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23
4. 미군 정찰기 격추사건•24
5. 닉슨 독트린과 주한미군 철수•26
6. 자주국방과 방위산업: 불가피한 선택•29
Chapter 2 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31
1. 방위산업을 향한 첫발•31
2. 국방과학연구소(ADD)의 창설•35
3. 최초의 방위사업: 번개사업•47
4. 초기 방위산업 시설 및 공업단지•51
5. 방위산업 육성의 밑그림과 제도 구축•55
6. 우리나라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64
7. 율곡사업(‘국방 8개년 계획’)과 기본병기 국산화•81
8. 방산기술의 발전•90
9. 방산기술인력 양성•102
10. 한국방위산업진흥회의 설립•111
Chapter 3 방위산업의 시련과 도전•119
1. 핵개발•119
2. 미사일 개발•127
3. 전두환 정권과 국방과학연구소의 구조조정•141
4. 획득환경과 제도의 변화•144
5. 2차 율곡사업과 한국형 무기체계 개발•146
Chapter 4 방위산업의 안정과 성장•149
1. 3차 율곡사업과 첨단전력 확보•149
2. ‘818 군구조 개편’과 전력・획득조직 개편•151
3. 한국방위산업학회의 설립•153
4. 율곡사업 감사•158
5. 국외도입사업과 무기중개상•164
6.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의 방위력개선사업제도 개선•168
Chapter 5 방위산업의 경쟁과 도약•178
1. 국방획득제도개선과 방위사업청 신설•178
2. ‘국방개혁 2020’과 전력증강 방향•184
3. ‘국방개혁 307계획’•189
4. 방위산업 신경제성장 동력화•192
5. 업체 주관 개발의 활성화와 글로벌 도약의 시작•915
6. 방위사업의 투명성•198
7. 방위산업은 그래도 꿋꿋하다•201
PART 2 방위산업의 발전과 성과 / 서우덕.장삼열 •202
Chapter 1 방위산업 정책 및 제도의 변천•205
1. 방위산업 발전의 시대 구분•205
2. 역대 정부의 방산 육성정책•209
3. 국방획득조직의 변천•225
4. 국방획득 의사결정 기구의 변천•245
5. 방위사업수행체제의 발전•251
6. 방위산업 보호·육성정책•261
7. 방위산업의 개방 및 경쟁체제화•274
Chapter 2 분야별 방위산업 형성과 발전•283
1. 탄약 업체•283
2. 기동・화력장비 업체•288
3. 함정건조 역사와 함정 업체•296
4. 항공기 생산・정비 업체•308
5. 유도무기・로켓 업체•321
6. 통신장비 업체•327
7. 지휘통제(C4I)체계/전투체계 업체•333
8. 감시정찰 분야 업체•338
9. 화생방 분야 업체•344
Chapter 3 방위산업의 성과•346
1. 국산 명품 무기체계•346
2.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현황 및 위상•349
3. 방산수출•356
4. 방위산업의 기술파급 및 산업파급효과•360
Chapter 4 우리 방위산업의 특징과 발전 방향•372
1. 우리 방위산업의 특징•372
2. 방위산업 발전 방향과 전망•377
PART 3 국산 무기체계의 개발 / 신인호 •380
Chapter 1 소화기•383
1. 개인화기•383
2. K3 / K12 / K6 기관총•388
3. 유탄발사기와 소총의 복합화•393
4. 복합형 소총 - 세계 최초 개발•936
5. 특수목적 소총과 권총•399
Chapter 2 화력무기•402
1. 견인포•402
2. 자주포•408
3. 탄약운반장갑차•420
4. 박격포•423
5. 다연장로켓•428
Chapter 3 기동무기•432
1. 전차•432
2. 장갑차•450
3. 차륜형 장갑차•473
4. 상륙돌격장갑차•476
Chapter 4 함정•482
1. 수상함•482
Chapter 5 항공기•513
Chapter 6 유도무기•540
1. 지대지유도무기•540
2. 순항미사일•546
3. 스마트폭탄 KGGB•560
4. 어뢰•562
Chapter 7 방공무기•580
1. 대공포•580
2. 대공유도무기•589
Chapter 8 지휘통제 및 통신•601
1. 통신장비•601
2. 두뇌와 중추신경 C4I•613
3. 데이터링크 - 네트워크 중심 작전환경 구현•166
Chapter 9 무인체계•621
1. 로봇과 무인(無人)•622
2. 병사도 디지털 환경에 연동•628
3. 무인수상정 및 무인잠수정•631
4. 하늘의 로봇, 무인항공기•634
5. 경제성도 높이고 전투효과도 올린다•641
Chapter 10 감시정찰 및 전자전 무기체계•642
1. 전자전 체계 •643
2. 레이더 체계•646
3. 합성개구레이더(SAR) 체계•651
4. 전자광학/적외선(EO/IR) 센서•652
5. 수중감시체계•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