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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산업의 역사(한국방위산업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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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8), 국방과학연구소(ADD)의 창설

방산백서 제1부(8), Chapter 2 '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




방산전문 매체 '글로벌디펜스뉴스'는 '한국방위산업학회(회장 채우석)'가 지난 2년간 집필한 '방위산업 40년, 끝없는 도전의 역사' (이하 '방산백서')를 전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하여 방위산업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래의 전문은 '방위산업 40년, 끝없는 도전의 역사' (이하 '방산백서')의 원문이며, 한국방위산업학회의 동의 하에 게재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자주국방을 위해 방산제품 개발에 참여한 민·관····연 관계자와 방산제품 시험 도중 부상 당하거나 순직하신 모든 분들께 격려와 위로의 박수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제1부 요약>

제1부에서는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태동부터 현재의 방위산업에 이르기까지 방위산업과 관련된 주요사건과 이슈 중심으로 정리했다. 우리나라 방위산업은 1960년대 말부터 있었던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과 주한미군 철수 등 한반도 안보환경의 불안정을 극복하고 자주국방을 실현하려는 의지와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창설하고 이어 한국의 최초 방위사업이라 할 수 있는 번개사업과 1차 율곡사업을 시작하여 짧은 기간에 미사일까지 개발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기반이 된 중화학공업은 곧 방위산업을 위해 육성되었고 방위산업과 함께 발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미사일 개발이 중단되고 국방과학연구소가 축소되는 등 시련의 과정이 있었으나, 2・3차 율곡사업을 통해 방위산업의 기반이 다져지고, 한국형 정밀무기 개발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었다. 율곡감사는 방위사업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고, 각 정부별로 이루어진 국방개혁과 획득제도 개선 및 방위력개선사업을 통해 방위산업은 내실을 다지면서 첨단화를 지향해왔다. 2006년 방위사업청의 설립으로 방위산업은 개방과 경쟁의 장(場)으로 진입하는 변혁을 겪게 되었고 국제경쟁력 강화를 모색하는 과정에 있다.






Chapter 2 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

8.국방과학연구소(ADD)의 창설

국방과학연구소 이전의 국방과학기술연구 활동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 군사기술 환경이 매우 척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은 독자적인 무기생산 및 연구개발이 필요하다는 인식 하에 1948년 12월 15일 육군특별부대 산하에 ‘육군병기공창’을 창설했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병기공창이었고, 주로 수류탄, 지뢰 등 소형 병기와 탄약부품 및 병기 부속품의 제작생산, 정비 및 재생 업무를 수행했다.

1949년 12월 15일 국방부에 ‘병기행정본부’가 창설되면서 육군병기공창이 병기행정본부 예하의 ‘국방부병기공창’으로 격상되었다. 병기행정본부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6월 15일 병기공창 산하의 제1공장과 제2공장을 ‘제1조병창 및 제2조병창’으로 확대 개편했으며, 병기와 탄약의 연구와 시험을 위해 ‘과학기술연구소’를 창설했다. 이로써 군수공장과 연구개발기구를 구분하여 개발과 생산 체제를 갖추었다. 

과학기술연구소는 우리나라에서 군사과학기술을 연구한 최초의 연구소이다. 병기행정본부는 화학, 기계, 금속, 전기 등 모든 기본적인 기술 분야를 다루었고, 병기제조뿐만 아니라 민수 분야의 각종 생산기술 문제까지 담당함으로써 국가적 기술센터의 역할도 수행했다. 1952년 10월 1일 제1・2조병창은 국방부 조병창으로, 과학기술연구소는 ‘국방부과학기술연구소’로 각각 개편되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과학기술연구소는 부산에 위치하여 당시 우리나라 화학계의 선구자였던 안동혁 박사 등 최고 권위자들을 연구지도진으로 초빙하고, 성좌경 교수 등 현직 교수들을 대거 연구진에 참여시켜 국가 총동원 연구체제를 구축했고, 전자현미경, X선분석장비 등 연구실험 장비들을 확보하고, 병기 및 탄약 연구, 군용 식량 연구, 각종 군용 재료 연구 등 다수의 실적을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방부병기행정본부 산하의 과학기술연구소는 1953년 부산에서 복귀한 후 1954년 7월 14일 대통령령으로 국립연구기관인 ‘국방부과학연구소’로 격상되었다. 국방부과학연구소는 군용 식량, 피복, 유・무기재료, 원자력 이용, 로켓 등에 대한 연구를 주로 했고, 13건의 발명특허를 획득했다. 1959년 7월 27일에는 인천시 고천동 해안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나라 최초로 3단 로켓 발사시험에 성공했다. 그러나 국방부과학연구소는 1961년 8월 6일부로 해체되면서 새로 창설된 ‘육군기술연구소’로 흡수되었다.






육군은 소규모 육군병참기술연구소와 육군병기기술연구소를 운용해오다가 이 두 기술연구소를 통합하고, 국방부과학연구소의 기능을 물려받아 1961년에 ‘육군기술연구소’를 창설했다. 운영인력은 약 300명이었으며, 1964년에 육군31화학실험소를 통합했고, 비상식량, 열관리, 군용 고무 및 플라스틱, 군용 피복 등에 대한 연구와 규격작성 및 표준화사업과 시험분석업무를 수행했다. 1970년 3월 28일에는 육군전투발전사령부와 통합되어 해체되고, 그 기능의 일부가 1970년 8월 창설된 국방과학연구소(ADD)로 편입되었다.

해군은 6・25전쟁 이전에 최초의 수상함인 제1충무공호를 건조하는 등 독자적인 연구개발 활동을 했으며, 1951년 3월 23일 해군본부 함정국 산하에 ‘해군기술연구소’를 창설하여 함정기계, 함정재료, 특수무기, 유・무기화학 및 전기화학, 함정전기 및 전자장비 등에 대한 연구를 했다. 1951년에는 재단법인으로 독립하여 해군용 특수탄 및 잠수함용 축전지, 함정용 디젤기관 연구개발을 수행했다. 1951년 7월에는 수상항공기 통해호(統海號)를, 8월에는 두 번째 수상함인 제2충무공호를 건조했다.

1952년 9월에 재단법인 해군기술연구소는 참모총장 직속으로 새로이 설치된 해군과학연구소에 흡수되었다. 해군과학연구소는 해군기술연구소를 중심으로 확대 개편되어 연구개발 활동을 계속하다가 1958년 11월 15일에 해체되었다. 공군은 1952년 11월 공군기술학교를 중심으로 ‘부활호(復活號)’라는 이름의 경비행기 설계 및 제작에 착수하여 시험비행에 성공한 바 있다. 1958년 3월 15일 제81항공수리창 내에 공군기술연구소를 창설하여 항공 관련 기술자료 수집, 실험용 소형로켓 제작, 전단살포용 풍선 개발, 2인승 글라이더 개발 등 연구를 수행했다. 

그러나, 공군기술연구소는 1963년 4월 1일 해체되어 그 기능이 제81항공수리창으로 흡수되었다. 제81항공수리창은 1969년 10월 M-73 활공기 비행시험 성공, 1972년 7월PL-2(새매) 경비행기 비행시험 성공 등 자체적으로 꾸준히 연구 활동을 계속하다가 1972년 국방과학연구소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이처럼 우리 군은 창군 초기부터 무기개발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나름대로 연구개발을 적극 추진했으나, 국가재정 여건, 과학기술 수준, 산업시설, 기술인력 등의 여건이 미흡하여 제대로 된 연구를 하기 어려웠다.






국방과학연구소 창설 경과

1969년 8월 미국에서 닉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박 대통령은 1970년 1월 19일 국방부 연두 순시에서 방위산업의 육성과 국방과학기술의 연구가 시급함을 강조했고, 2월 2일에는 국방부에 ‘방위산업 육성 전담부서’를 설치할 것을 지시했으며, 4월 25일 ‘민수산업의 육성 보완을 통한 방위산업의 기반구축’이라는 방위산업 추진전략에 관한 구상을 밝혔다.

이어서 4월 27일에는 정래혁 국방부 장관에게 “연구기관을 설치하고, 민간인을 고용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같은 수준으로 대우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박 대통령이 과학입국을 위한 기반조성을 위해 1966년 2월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연구소이다. 당시에 이미 연구소로서의 상당한 위상과 규모를 갖추고 있었는데, 박 대통령은 군사과학기술 분야에도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같은 성격의 연구소를 생각한 것이다. 이 지시가 국방과학연구소 창설의 첫 번째 단초로 보인다.

그러는 와중에 1970년 6월 5일 서해상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우리 어선을 지도하던 해군의 방송선이 북한 해군 함정의 공격을 받아 승무원 20여 명이 사상된 채 북한으로 끌려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남한의 해군력은 북한에 비해 매우 열세였다.

이 사건을 당한 남한의 방송선은 120톤급으로 최고속도 12노트에 40mm와 20mm기관포를 장착한 낡은 선박이었는 데 비해, 북한의 경비정은 250톤급으로 최고속도가 25노트에 70mm 포와 기관포 및 레이더를 장착한 신형 고속포함이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2주 후인 6월 22일 새벽 3시 50분경 북한 무장공비 3명이 잠입하여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문 지붕에 전자식 폭탄(크레모아식 지뢰로 추정)을 설치하다가 실수에 의해 폭탄이 폭발했다. 1명은 현장에서 죽고 2명은 군・경・예비군의 추격을 받아 계양산에서 사살되었다. 

이들은 6・25 기념식 때 정례적으로 현충원에 참석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러한 위기감이 연속되는 가운데 1970년 6월 27일 청와대 회의에서 ‘(가칭)국방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할 것을 결정하고, 초대 소장으로 주독대사를 지내고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소장으로 있던 신응균 예비역 중장을 내정했다. 청와대 결정에 따라 1970년 7월 16일 정래혁 국방부 장관과 신응균 소장이 설립기본계획을 수립하여 보고했는데, 박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의 설립에 관해 다음과 같은 지침을 주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육・해・공군의 연구개발 기능을 통합 수행하도록 하고, 국립이 아닌 법인체로 하되 전액 정부의 출연금으로 운영하도록 하며, 소장은 장관급으로 하고 부소장은 차관급 또는 현역 중장으로 하되, 소장이 군인 출신인 경우 부소장을 저명한 과학자로, 소장이 과학자인 경우에는 부소장을 군인 출신으로 임명하여 서로 보완하도록 한다.” 1970년 8월 6일 대통령령 제5267호로 ‘국방과학연구소 직제령’이 공포되어, 국방부 예하의 국립 국방과학연구소가 창설되었다. 초기의 연구요원은 육・해・공군 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던 이공계 과학자와 육군기술연구소에 있던 연구원 등 모두 60여 명이었다. 

국내 일반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연구원을 유치하는 데는 시간적으로나 보수체계 등이 여의치 않아서 우선 육・해・공군사관학교의 교수요원들과 해군의 OR팀에서 시스템 분석을 하던 현역 박사학위 소지자 14명을 연구요원으로 충원했다. 행정요원으로는 국방부 사무관급 실무자 등 공무원과 예비역 장교들을 일부 충원했다. 2년 후인 1972년 8월에는 연구소장이던 심문택 소장이 해외 과학기술자 유치대상 30명을 선정하고 구미지역을 순방하면서 1차로 12명(미국 11명, 독일 1명)의 해외 과학기술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1970년 12월 31일에는 ‘국방과학연구소법’이 제정・공포되었다. 연구소의 설립 목적은 “국방에 필요한 병기, 장비 및 물자에 관한 기술적 조사・연구・개발 및 시험과 이에 관련되는 과학기술의 조사연구 및 시험 등을 담당하게 하여 국방력의 강화와 자주국방의 완수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제1조에 명시했다. 그리고 연구소의 성격을 국방부의 연구개발 업무를 대행하는 기관(agency)으로 규정하고, 사업계획을 국방부 장관에게 승인을 받아 수행하도록 하며, 비용을 전액 정부 출연금으로 충당하도록 했다.







연구소의 이사장은 국방부 장관, 부이사장은 국방부 차관이 되고, 이사진은 합참의장, 각 군 참모총장, 경제기획원・상공부・과기처 차관, 연구소장 등으로 구성했다. 연구원의 신분은 법인체의 직원(민간인)이지만, 복무에 있어서는 공무원법을 준용하도록 하여 준공무원의 신분이 되고, 여권도 관용여권을 발급하도록 했다. 연구소의 성격도 재단법인이나 사단법인과는 다른 특수법인으로 정했다. 

이듬해인 1971년 1월 22일에 국방과학연구소법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같은 날 연구소 정관이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인가를 받음으로써 정식 연구소가 되었다. 1970년 8월 6일 설립 당시의 조직은 6개 연구부와 기획조사부 및 총무부로 구성되었고, 정원 60명 중에서 45명이 충원되어 운용이 되었다. 법인체로 전환 후 1971년 2월 10일 최초 이사회에서 의결된 연구소 조직은 연구소장 예하에 3개 부와 총무부가 있었고, 총 인원은 169명이었다. 

제1부에는 기획실, 조사분석실, 자료실, 도서실을 두었고, 제2부에는 시스템분석실, 병기개발계획실, 방위산업기획실을, 제3부에는 제1・2・3・4연구실을 두었으며, 총무부는 서무, 인사, 회계, 시설 등을 담당하게 했다. 1971년 말 번개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을 6개 연구실(소화기, 박격포, 탄약/지뢰, 로켓, 통신, 물자)과 기획관리실, 기술관리실 및 총무과로 개편했다가, 번개사업이 끝난 후 다시 7개 부 체제로 개편하는 등 이후 여러 차례의 조직개편이 있었다.

연구소 위치는 창립 당시에는 홍릉의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커뮤니티 센터(Community Center)에서 시작했고, 1970년 9월 3일 서울 서빙고의 구(舊) 국방부건설본부 자리에 임시로 있다가, 1971년 11월에 통의동의 구(舊) 육군보안사령부 자리로 옮겼다. 1971년 4월 14일에는 서울 홍릉에 부지를 선정하고 기공식을 가졌으며, 1973년 3월에 완공되었다. 이후 1974년 여름에 대전 대덕군에 연구소 부지를 선정하여 1976년 12월 3일에 ‘대전기계창’이라는 명칭으로 대전연구소의 준공식을 거행했다.

시험평가 시설 확보를 위해 1972년 4월 28일부터 경기도 포천의 한미공동사격장을 ‘다락대시험장’으로 명명하여 각종 무기의 야외시험사격장으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1974년 3월에는 유도무기 전용 시험사격을 위한 장소로 안흥에 부지를 확보하여 공사에 착공했다. 이후 안흥의 유도무기 전용 시험장을 종합시험장으로 확장하면서 1977년 10월 4일부터는 시험평가 전담기구인 ‘시험평가단’을 잠정 편성하여 운영하다가 1978년 4월 27일에 정식 기구로 발족시켰다.

품질보증 업무를 위해 1977년 5월 4일 약 250명의 인원으로 ‘품질보증단’을 창설하여 운용하다가 1979년 11월 15일에 이를 ‘품질검사단’으로 개편하여 부설기관으로 설치했다. 1981년 7월 1일에는 이 품질검사단과 국방부 조달본부의 품질보증국을 통합하여 ‘국방품질검사소’로 분리・독립시켰다. 또한 1979년 1월 10일에는 국방정책을 체계적으로 분석・연구하고, 국방정책 결정에 전문적인 자문을 제공하기 위해 ‘국방관리연구소’를 부설기관으로 신설했다. 이 국방관리연구소는 1987년 3월 2일 한국국방연구원(KIDA)으로 분리・독립되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정식 명칭보다는 줄임말인 ‘국과연’이나 영문 약자 ‘ADD’로 흔히 불린다. 초기의 영문 명칭은 RADS(Research Agency for Defense Science)라고 했다가 1971년부터 ADD(Agency for Defense Development)로 바뀌었다. 국방과학연구소에는 기념비가 2개 눈에 띈다. 정문부터 시작되는 비탈길을 올라가서 운동장 앞에서 각 건물로 갈라지는 도로 옆에 하나, 제1연구동으로 불리는 건물 앞에 하나가 있다. 모양은 다르지만 두 기념비의 공통점은 음각된 글귀가 같다는 점이다. 바로 ‘국방의 초석(國防의 礎石)’이라는 글귀이다.

무기체계 개발과 관련 기술의 연구개발을 통해 국방력 강화와 자주국방 완수에 기여하라는 의미이다. 현재도 국방과학연구소의 모든 연구기술진의 마음에 신념처럼 새겨진 이 문구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1976년 연구소에 하사한 친필 휘호이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주한미군 감축 등 어려운 안보상황에 직면해 있던 1960년대말 자주국방태세를 확립하는 데 기초가 될 무기체계 연구개발 기관으로서 국방과학연구소의 설립은 당시 국민적 여망과 시대적 요청을 담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확고한 안보관과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신념이 바탕이 되었다.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을 지내다 원자력연구소장을 역임했던 고(故) 한필순 박사의 회고에 의하면, 경제 또한 어려웠던 그 시기에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이 보내오는 자금이 국방과학연구소를 창설하는 데 투입되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부터 1978년까지 공식적으로 국방과학연구소를 12번이나 방문했다. 그만큼 국방과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다. 이처럼 완수하기 어려운 ‘특명’이 국방과학연구소에 주어졌고, 그 특명을 국방과학연구소는 여러 차례 완수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방과학연구소에 지시한 병기개발 사업에 대해서는 청와대가 직접 감독하고 통제했다. “매일매일 진척 상황을 보고하라”는 청와대의 독촉에 과학자들은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듯 쫓기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초창기 국방과학연구소 핵심 연구원이었던 이경서, 구상회, 홍재학 박사 모두 당시 박 대통령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늘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셨죠. 시험장, 기계창 건설현장을 둘러볼 땐 일꾼들이 먹는 임시 식당에 들러 ‘밥 한 그릇 부탁합니다. 그냥 있는 대로 가져오세요’ 했어요. 대통령이 불쑥 들어와서 밥을 달라고 하니 다들 기절초풍했지요. 대통령은 밥 한 그릇에 숭늉을 뚝딱 비우면서 그저 ‘무기 만들어야 힘 있는 나라가 된다’고만 강조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창설된 이래 유도무기, 항공기, 전자광학, 해상, 수중무기, 장갑차, 전차, 화포, 개인병기류 등 국방에 필요한 병기・장비의 연구개발 및 기술지원으로 자주국방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40여 년 동안 핵무기를 제외한 각종 첨단무기체계 개발 능력을 보유하고, 국방과학기술 수준을 세계 10위권 수준까지 발전시키면서 국방력 강화에 기여하고 있다.


국방과학연구소 진해분소

해군 방송선 피랍사건 등으로 군함이 필요할 때, 해군에는 조함(함정 건조)기술 능력이 없어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 설계를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해군은 ‘학생호’를 설계한 경험과 인력을 바탕으로 자체적으로 해군 조함연구소를 설립하려고 했다.

1974년 2월에 해군에서 조함연구소 설립안을 작성하여 국무회의에 상정했는데, 당시 과기처 최형섭 장관이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선박연구소를 설립하려고 하니 이는 국가적으로 중복투자라 하여 부결되었다. 1974년 12월 16일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율곡계획을 보고할 당시 황정연 해군 참모총장이 박 대통령에게 군함 건조에는 특수한 전문기술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조함연구소 설립을 건의하자, 박 대통령은 과기처 장관, 해군 참모총장, 국방과학연구소장, 경제제2수석비서관이 검토해서 건의하라고 지시했다. 

오원철 수석과 해군은 조함에 대한 연구보다도 북한 잠수함의 탐지와 방어대책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기 때문에 대잠수함 병기개발을 위한 연구소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접근했다. 이에 대해 과기처 장관도 필요성을 인정하고 조함연구소가 아닌 병기개발을 위한 연구소 설립에 동의했다. 다만 작은 나라에서 별도의 연구소 설립은 곤란하니 국방과학연구소의 일부로 설립하는 조건으로 동의했다. 

이렇게 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선박연구실과 국방과학연구소의 해군병기개발부서 및 해군 산하의 조함연구 기능을 통합하여 국방과학연구소 산하에 수중무기 개발을 주임무로 하는 ‘해군연구소’를 만들게 되었다. 장소는 수중무기 개발의 특성과 편의성을 위해 진해에 설치하는 것으로 했다. 이 계획은 1976년 3월 12일에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고, 1976년 5월 19일에 ‘진해연구소’라는 위장명칭으로 설치되어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선박연구실장이던 김훈철 박사가 소장으로 임명되었고, 1977년 1월 조직개편을 계기로 ‘진해기계창’으로 변경되었다.


< 전편 - 방위산업을 향한 첫발 >
< 다음편 - 최초의 방위사업: 번개사업 >



                                           < 연 재 순 서 >


PART 1 방위산업의 역사 / 서우덕 •16

Chapter 1 방위산업이 태동되기까지 •19

1. 1・21사태(김신조사건)•19
2. 미국 푸에블로호 납치사건•21
3.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23
4. 미군 정찰기 격추사건•24
5. 닉슨 독트린과 주한미군 철수•26
6. 자주국방과 방위산업: 불가피한 선택•29


Chapter 2 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31

1. 방위산업을 향한 첫발•31
2. 국방과학연구소(ADD)의 창설•35
3. 최초의 방위사업: 번개사업•47
4. 초기 방위산업 시설 및 공업단지•51
5. 방위산업 육성의 밑그림과 제도 구축•55
6. 우리나라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64
7. 율곡사업(‘국방 8개년 계획’)과 기본병기 국산화•81
8. 방산기술의 발전•90
9. 방산기술인력 양성•102
10. 한국방위산업진흥회의 설립•111


Chapter 3 방위산업의 시련과 도전•119

1. 핵개발•119
2. 미사일 개발•127
3. 전두환 정권과 국방과학연구소의 구조조정•141
4. 획득환경과 제도의 변화•144
5. 2차 율곡사업과 한국형 무기체계 개발•146


Chapter 4 방위산업의 안정과 성장•149

1. 3차 율곡사업과 첨단전력 확보•149
2. ‘818 군구조 개편’과 전력・획득조직 개편•151
3. 한국방위산업학회의 설립•153
4. 율곡사업 감사•158
5. 국외도입사업과 무기중개상•164
6.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의 방위력개선사업제도 개선•168


Chapter 5 방위산업의 경쟁과 도약•178

1. 국방획득제도개선과 방위사업청 신설•178
2. ‘국방개혁 2020’과 전력증강 방향•184
3. ‘국방개혁 307계획’•189
4. 방위산업 신경제성장 동력화•192
5. 업체 주관 개발의 활성화와 글로벌 도약의 시작•915
6. 방위사업의 투명성•198
7. 방위산업은 그래도 꿋꿋하다•201



PART 2 방위산업의 발전과 성과 / 서우덕.장삼열 •202

Chapter 1 방위산업 정책 및 제도의 변천•205

1. 방위산업 발전의 시대 구분•205
2. 역대 정부의 방산 육성정책•209
3. 국방획득조직의 변천•225
4. 국방획득 의사결정 기구의 변천•245
5. 방위사업수행체제의 발전•251
6. 방위산업 보호·육성정책•261
7. 방위산업의 개방 및 경쟁체제화•274


Chapter 2 분야별 방위산업 형성과 발전•283

1. 탄약 업체•283
2. 기동・화력장비 업체•288
3. 함정건조 역사와 함정 업체•296
4. 항공기 생산・정비 업체•308
5. 유도무기・로켓 업체•321
6. 통신장비 업체•327
7. 지휘통제(C4I)체계/전투체계 업체•333
8. 감시정찰 분야 업체•338
9. 화생방 분야 업체•344


Chapter 3 방위산업의 성과•346

1. 국산 명품 무기체계•346
2.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현황 및 위상•349
3. 방산수출•356
4. 방위산업의 기술파급 및 산업파급효과•360


Chapter 4 우리 방위산업의 특징과 발전 방향•372

1. 우리 방위산업의 특징•372
2. 방위산업 발전 방향과 전망•377



PART 3 국산 무기체계의 개발 / 신인호 •380

Chapter 1 소화기•383

1. 개인화기•383
2. K3 / K12 / K6 기관총•388
3. 유탄발사기와 소총의 복합화•393
4. 복합형 소총 - 세계 최초 개발•936
5. 특수목적 소총과 권총•399

Chapter 2 화력무기•402

1. 견인포•402
2. 자주포•408
3. 탄약운반장갑차•420
4. 박격포•423
5. 다연장로켓•428

Chapter 3 기동무기•432

1. 전차•432
2. 장갑차•450
3. 차륜형 장갑차•473
4. 상륙돌격장갑차•476

Chapter 4 함정•482
1. 수상함•482

Chapter 5 항공기•513

Chapter 6 유도무기•540

1. 지대지유도무기•540
2. 순항미사일•546
3. 스마트폭탄 KGGB•560
4. 어뢰•562

Chapter 7 방공무기•580

1. 대공포•580
2. 대공유도무기•589

Chapter 8 지휘통제 및 통신•601

1. 통신장비•601
2. 두뇌와 중추신경 C4I•613
3. 데이터링크 - 네트워크 중심 작전환경 구현•166

Chapter 9 무인체계•621

1. 로봇과 무인(無人)•622
2. 병사도 디지털 환경에 연동•628
3. 무인수상정 및 무인잠수정•631
4. 하늘의 로봇, 무인항공기•634
5. 경제성도 높이고 전투효과도 올린다•641

Chapter 10 감시정찰 및 전자전 무기체계•642

1. 전자전 체계 •643
2. 레이더 체계•646
3. 합성개구레이더(SAR) 체계•651
4. 전자광학/적외선(EO/IR) 센서•652
5. 수중감시체계•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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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 의원, '국방비 불용액' 방산업체 지급 추진
‘신성장동력 방위산업 어떻게 할 것인가?’란 주제로 6월 27일(월)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이날 세미나는 백승주 의원실(새누리당, 구미시 ‘갑’) 주최, 국회국방위원회·방위사업청·한국방위산업진흥회·한국방위산업학회 후원으로 개최되었다. 국회 국방위원장 김영우 의원은 “방위산업은 자기 나라를 자기 손으로 지키겠다는 국가적인 의지의 표현입니다. 북한은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 극단적인 도발을 해오고 있고, 해외시장에서 우리 방산업체들이 경쟁해야 할 회사들은 너무 거대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방위산업이 신성장동력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전폭적인 관점과 혁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나온 각종 의견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정책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장명진 방위사업청장은 “전쟁터 같은 세계 방산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글로벌 방산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을 정도의 체격과 기술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방사청은 오늘 토론회에서 개진되는 의견들을 정책에 적극 반영하여 방위산업이 신성장동력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유도해 나가겠습니다.”라고 밝혔다. 한국방위산업학회 채우석 회장은 ‘방위산업의 미래를 위한 패러다임 혁신‘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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