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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이 부여한 한국의 운명은 '국제공산당' 해체 (제1편)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공산주의의 본산 '소련'을 무너뜨리다


                                                                               한국방위산업학회 채우석 회장                             

2019년 1월 말 기준으로 국제정세를 분석하자면 약 100년 전 청일전쟁이 발발하던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노쇠한 중국과 신흥 강국 일본의 한 판 승부가 벌어진 뒤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을 청나라의 도움으로 진압한 조선은 청나라의 내정간섭에 속수무책이었고 사실상 청나라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 뒤 1894년 7월부터 발발한 청일전쟁 이후 조선반도에 대한 지배권은 사실상 일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우는 1910년부터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내용은 별 의미가 없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1882년 임오군란 이후부터 조선은 누군가의 식민지로 전락했으며 그 소유권이 누구에게 넘어가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민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아시아의 주도권은 급속하게 일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1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2019년 1월의 국제정세를 보면 중국은 서방국가의 파상공세로 붕괴 직전에 처해 있으며, 그 틈을 타서 일본이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거듭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하는데 최선봉에 서 있는데 대한민국의 문재인 정부는 망해가는 중국과 북한 편에 서서 열심히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그런 정치인들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선출하였기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다시 일본의 노예로 전락한다고 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물게 탁월한 2명의 지도자가 30년을 통치하면서 닦아 놓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 기반이 너무나도 막강하여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는 상황이라서 그나마 안심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20대 초반에 전국적인 인물이 된 청년 이승만,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를 통해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자유’ 등을 역설하면서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다 역모죄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수감된다. 그 안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배재학당 아펜젤러 선교사의 말이 떠올라 하나님을 믿게 되고 수감된 한성감옥 안에 성경을 밀반입하여 몰래 공부를 하게 된다.

5년 7개월 동안 영어 성경을 독파한 이승만은 러일전쟁 직후에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으로 건너가서 조선의 독립에 대해서 미국 전역의 교회를 돌면서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배재학당 2년의 학력을 인정받아 조지와싱톤 대학에 입학한 후 2년 만에 졸업을 하고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 과정을 총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마치게 된다.

청년 이승만이 다녔던 조지와싱톤 대학의 총장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였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청년 이승만은 미국의 주요 정치인들과 많은 교류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인맥을 쌓게 된다. 그 뒤, 1941년 이승만은 동아시아의 정세를 분석한 ‘JAPAN INSIDE OUT’이란 책을 출간하여 일본이 미국을 선제공격 할 것을 경고하였고 실제로 수개월 뒤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이승만은 미국에서 큰 명성을 얻게 된다. 

이런 명성을 얻은 이승만은 카이로 회담에 임하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편지 3통을 써 보내는데 이런 노력들이 모두 반영되어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 회담 문서에 “조선 국민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과정을 통해 한국을 자유 독립국으로 할 것을 결의한다.”는 문구가 삽입되게 된다. 100여 개의 식민지 중 카이로 회담 문서에 유독 조선의 독립에 대해서만 언급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청년 이승만이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정치인들을 설득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였기에 가능했던 일인 것이다. 


국제정치학계 거물이 된 이승만 박사, 한국전에 미군 178만 명을 끌고 오다

이런 청년 이승만의 노력은 한국전 발발 직후에도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데,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이 소련제 탱크 200여 대를 앞세우고 38선 전 지역에서 남하를 하자 미국은 즉각적으로 파병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 7월 1일 스미스부대 540명이 부산에 상륙한 이래로 3년 1개월 동안 178만 명을 한반도에 보내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하게 된다.

2009년 미 국방정보센터가 미 의회조사국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전 당시 미국은 전쟁 비용과 전후 복구비용으로 약 670억 달러를 지출하였는데,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6,910억 달러로 한화로는 약 767조원이나 되는 큰 금액이다. 이 모든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청년 시절부터 미국 정치인들과의 교류를 하면서 조선반도(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역설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시아인을 원숭이로 묘사하던 당시 미국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미국이 청년 이승만과 그의 조국인 조선 그리고 신생국가인 대한민국에 베풀었던 호의는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한국전이 발발하자마자 미국의 목사님들이 미국의 대통령과 정치인들에게 파병하여 대한민국을 구원하도록 강력히 요청한 기록들을 본다면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교회를 돌면서 설교를 한 것이 조선 독립과 한국전 직후 대한민국의 구원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이르기까지 매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2억 달러 무상원조, 20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기의 무상원조를 요구하여 모두 관철시킨다. 이 과정에서 한국전 종전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미국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에게 지시하여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를 미군 몰래 석방시킨다. 이 조치로 인하여 미국은 중국과 북한에게 내어줄 포로들을 모두 잃게 되고 한반도에서 철수하지 못한 채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수호신이 된 이승만 대통령, 저승에서 대한민국을 구하다

그런 상태에서 미군이 철수를 한다면 미국은 겁쟁이 국가로 낙인이 찍히게 되고 1, 2차 세계 대전을 통해서 얻은 자유진영의 맹주로서의 패권을 모두 잃어버릴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이다. 결국,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는 대신 ‘정전협정’에 방해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끝까지 ‘정전협정’에 서명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문재인 정권이 우리 국민들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중국과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여 ‘종전협정’에 서명을  하고 유엔군과 미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려고 하여도 대한민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에 ‘정전협정’에 서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사국이 아닌 관계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후 2억 달러 무상원조와 20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기의 무상원조는 유상원조로 바뀌는 등 흐지부지 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반영구적으로 유효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상태로 남아 있다.  


사형수 박정희를 살리고 미국 유학까지 보낸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은 남로당 사건에 휘말려 사형선고를 받은 군인 박정희가 전향했다는 참모들의 의견을 듣고는 사면시켜 준다. 그 뒤, 군복을 벗고 별 볼일 없이 살다 죽을 운명에 처해 있었던 박정희는 북한군이 남침을 하자 군에 다시 복귀를 하여 북한군에 맞서 싸우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박정희 준장을 비롯한 장교단 25명을 1953년 12월 크리스마스 직후에 미국으로 보내 선진 문물을 공부하도록 배려한다. 

박정희 준장은 미국 유학 생활을 통해서 미국의 힘과 중요성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 미국 유학생활을 통해서 일본의 치밀함과 미국의 패권전략을 몸에 익히게 된다. 박정희 준장은 육군 소장이던 1961년 5월 16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게 되는데, 그 당시의 상황들을 보자면 식량부족으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였고, 북한의 남침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났으며, 완전히 박멸된 줄만 알았던 남로당 세력들이 다양한 형태로 수면 위로 올라와 각종 시위들을 벌여 대한민국 사회를 혼란으로 몰고 갔었다. 

이런 상태를 보다 못한 장준하, 함석헌 선생들과 같은 지식인들은 ‘군인들은 왜 쿠데타를 하지 않는가?’하고 군인들에게 욕을 할 정도였고, 군부 내에서도 여러 팀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그 모든 팀들이 한결같이 지도자로 박정희 소장을 추대한 것을 감안한다면 이승만 대통령이 사면하여 목숨을 살려준 군인 박정희가 실로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군인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생활, 일본 육사 생활, 미국 군사학교 유학 생활은 1970년대에 박정희 정부가 중화학공업에 투자를 하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박정희 정부가 집권했을 당시의 국내 사정은 굶어 죽는 사람에 대한 내용이 신문기사에 게재될 정도로 열악했으며 각종 범죄 등으로 무정부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집권한 박정희 정부가 대한민국을 농업국가로부터 산업국가로 혁신하기 위해 10년도 더 걸리는 세월이 소요되며 수백억 달러의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자되는 중화학공업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당시여건을 고려시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 식의 무모한 일로 보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학자 및 정치인들이 중화학공업투자를 반대하게 되어 상황이 어렵게 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해 국회를 해산시키는 등의 강압적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런 조치가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조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현재 문재인 정권이 추구하는 민주주의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 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고,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추미애 대표가 2017년 12월 3일 중국공산당이 주최하는 국제공산당대회에 초청되어 기조연설을 한 것을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10월 유신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로부터 ‘대한민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바라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 채우석 한국방위산업학회장 약력 >



- 1972년 육사 28기 졸업

- 1982년 미국 콜로라도주립대학교 경영학 석사학위 취득

- 1988년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경영학 박사학위 취득

- 2001년 준장 예편


 

 주요 군경력


- 육군본부 관리측정장교비용분석장교전사편찬과장 역임

- 국방부 평가관리관실 지상장비평가과장획득개발국 획득 3과장획득기획과장

- 국방부연구개발관조달본부 외자부장조달본부 차장 역임

- 서울대한양대전경련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 성균관대고려대전북대건국대 초빙교수

- 현 한국방위산업학회장현 방산선진화포럼 회장

- 저서 방위산업창조경제 현장을 가다.”(공저)

- 보국훈장 천수장 및 삼일장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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