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기독자유통일당(https://url.kr/5ou4j3) 홈페이지에 게재된 내용임을 알려드립니다.
제주 4.3사건은 1948년 5월 10일 ‘5.10 자유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남한내 공산주의자들(남로당세력)이 일으킨 공산폭동입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새별오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봉화를 올리는 것을 신호로 전 제주지역에서 방화, 약탈, 살인, 강간 등의 만행이 발생하였습니다.
공산폭동의 사령관 이덕구는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숨어지내면서 제주 4.3 사건을 총괄 지휘하였고, 김달삼은 투표용지 수만장을 훔친 뒤, 모슬포항에서 북한으로 월북하였습니다.
공산폭도들은 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들을 죽이고 경찰들의 옷을 빼앗아 입고 무기들을 탈취한 뒤 경찰로 위장 행세하면서 사람들을 죽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또 제주 KBS방송국을 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우리 군과 경찰이 투입되었으나 전투 중에 우리 군인 및 경찰들도 폭도들의 공격을 받고 많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기도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기도 하였습니다.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박진경 대령은 부임 후 45일 동안 혁혁한 공을 세워 폭도들의 진압에 탄력이 붙자 공산주의자였던 부하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또 공산폭도들은 옆 마을에 심방을 나갔다가 돌아오던 ‘대정교회’ 이도정 목사님을 납치하여 자신들의 폭동이 성공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을 하였다가 거절당하자 목사님을 산채로 생매장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제주도 ‘대정교회’ 이도종 목사님은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폭도들에게 성경책과 자신의 회중시계를 건네 주면서 하나님 믿고 회개하고 천국갈 것을 권유했다고 당시 체포되었던 ‘뭉치’라는 자가 자백한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현재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민주당은 제주 4.3사건을 ‘국가에 의한 폭력’으로 규정하고 ‘제주4.3특별법’을 만들어 공산폭동에 가담했던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키고 가해자의 후손들에게 각종 보상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2021년 2월에 통과시켰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주 4.3 사건과 연관된 제주도의 모든 유적지에 역사 왜곡용 안내 표지판을 세우고 원래 있었던 기념비를 철거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민주당은 공산주의 폭동이었던 제주 4.3 사건을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를 당장 중단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공산폭도들의 후손들에게 국민의 혈세를 지급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기 바랍니다.
제주 4.3 사건을 이해하시려면 1920년대 독립운동의 과정을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1919년 3월 1일 3.1만세 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여러 개의 임시정부들이 생깁니다. 대한국민의회(우수리스크, 1919년 3월 17일), 신한민국 임시정부(평양), 상해임시정부(1919년 4월 11일), 조선민국 임시정부(서울), 한성정부(서울, 1919년 4월 23일), 고려임시정부, 간도임시정부 등 많은 임시정부들이 생겼으나, 1919년 4월 23일 한성에서 생긴 ‘한성정부’로 통합 됩니다.
그러나 일본에 의해 활동이 제약을 받자 이 ‘한성정부’가 상해로 위치를 옮겨서 만들어진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년 9월 11일)’입니다. 이 당시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고 국무총리는 이동휘 였습니다.
그러나 국무총리 이동휘는 이미 1918년 5월 11일 러시아 하바로브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러시아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와 손을 잡겠다고 천명하였으며 한인사회당이 공산주의 운동을 위해 심신을 바치겠다고 충성맹세를 합니다.
1919년 4월 11일 설립된 상해임시정부의 군무총장(당시 국무총리는 이승만)이자, 1919년 4월 23일 설립된 한성정부의 국무총리(당시 대통령은 이승만)였던 이동휘는 레린에게 비밀리에 자신의 사람을 보내어 1차로 금화 40만 루불(327kg, 한화 약 510억원 상당)을 받아오게 합니다.
레린에게 자금을 받아 오다가 중간에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이르쿠츠크 공산당 내의 ‘전러한인공산당’ 대원들에게 자금을 탈취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것이 제1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입니다.
이동휘는 1920년 1월 하순에 자신의 측근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1922년 겨울까지 레닌과 비밀협정을 체결하고 금화 200만 루불(한화 약 2550억 원)을 다시 받아 옵니다. 이 자금을 상하이로 가지고 오다가 중간에 또 한인사회당 소속 김립을 만나서 한인사회당의 활동자금으로 이 자금을 쓸 것을 합의하고 자금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2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입니다.
상해와 연해주 및 만주지역에서 활동했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레닌이 보낸 자금을 받아서 소비에트를 위해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였고, 상해임시정부의 인사들도 이 자금에서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레린 자금에 대한 소유권 분쟁이 일어난 것에 대해 국무총리 이동휘를 문책하고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하게 됩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 핵심인물은 이동휘, 박진순, 김립 등이 있었으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핵심인물은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김단야 등이 있었습니다.
여운형, 김규식, 현순 등 52명은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가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소비에트 러시아 만세!’를 외치고 자본주의체제를 잿더미로 만들겠다면서 레린에게 충성맹세를 합니다.
이에 레린은 비밀리에 여운형에게 상해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체할 것을 지시합니다.
1919년 4월 11일에 건국되었던 '상해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따르면 “신인일치(神人一致)로 중외협응(中外協應)하야”라고 씌여 있는데, 이는 ‘하나님과 인간이 뜻의 일치로 세워진 국가’라는 뜻이었으며, 대한민국 임서헌장 선서문에는 ‘神의 國의 建設의 貴한 基礎이니라(하나님 나라 건설에 기초가 되는 국가)’라는 문장이 씌여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의 16대 손인 왕족 출신으로 한성감옥에서 영어 성경을 줄줄 외울 정도로 읽었으며 한성감옥 안에서 기독교 입국론이 담긴 독립정신을 1904년 2월 19일부터 6월 29일 사이에 집필을 하였습니다.
이 책의 주요 골자는 아래와 같으며 모든 것의 기본은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 통상해야 한다. 외국과 교류하는 것이 부국의 방법이다.
2. 신학문을 익혀야 한다. 신문물이 본인과 국가발전의 근본이다.
3. 외교를 잘 해야 한다. 강대국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며, 모든 나라에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
4.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국기는 주권의 상징이다.
5. 도덕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용기를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6. 자유를 존중하고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조지워싱톤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박사, 프린스턴대 신학 학사를 5년 5개월 안에 마칠 정도로 엘리트였으며 1920년대에 이미 세계적인 석학의 자리에 올라있었던 인물입니다.
이런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미국에서 미국 정부를 설득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으니 레닌이 한반도를 집어삼키고 한민족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체 시켜야만 했었던 것입니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를 기본으로 하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독재를 추구하였던 레린 입장에서는 민주주의, 기독교, 공화제, 민족주의 등은 철저하게 청산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레닌이 여운형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체할 것을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레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제거하는 것과 동시에 대한독립군단을 제거할 목적으로 경신참변(1920년 10월, 청산리 및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간도지역의 조선인 1만 여명을 학살하고 민가 25,000여채, 학교 30여 채를 불태운 사건) 이후 근거지를 잃어버린 대한독립군단에게 지원을 약속하고 러시아 연해주의 스보보드니(자유시)로 집결하도록 유인 합니다.
대한독립군단 3,500명이 러시아가 지원을 해 준다는 말에 속아 러시아 스보보드니시(자유시)에 1921년 6월 28일 집결하였다가 스보보드니 기차역에서 러시아군에 학살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이 '자유시참변' 입니다. 이 사건 이후 대한독립을 위한 무장독립투쟁은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훗날 청산리전투를 이끌었던 김좌진 장군도 1930년 1월 24일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서 암살 당합니다. 레린의 볼셰비키 혁명정부와 스탈린이 이끌었던 소련(소비에트연방)은 철저하게 민족주의자들을 제거하였습니다.
민족주의, 기독교, 민주주의, 공화제와 같은 개념들은 공산주의 확산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숙청하였던 것입니다.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의 기습 침략으로 발발한 6.25는
이미 1920년대부터 싹이 트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레닌의 지령을 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던 1922년에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킵니다.
또, 1925년 이승만 대통령 탄액안을 통과시킴과 동시에 ‘대통령 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킵니다.
1927년 1월 19일에는 소비에트식 공산주의체제 개헌을 하였고, 1927년 3월 5일 김구 내각에서 개헌안을 공포하였으며 김구가 소비에트체제의 주석이 됩니다. 그 후부터 김일성 주석처럼 김구 주석이란 호칭으로 불리게 됩니다.
탄핵 당사자인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있는 사이 불신임안을 통과시키고 탄핵을 시켰다는 것은 반란이자 쿠테타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탄핵 이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모든 정당성, 정통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국내외 모든 국민들이 뜻을 합하여 모든 임시정부를 '한성정부'로 통합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임명합니다.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서 상해로 위치를 옮긴 후 레린의 자금을 받은 세력들이 국민이 임명한 이승만 대통령을 레린의 자금을 받고서 탄핵시켰다는 것은 의회 쿠테타입니다.
그것도 미국에서 미국 정부를 설득하는 등 외교로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사이에 의회 쿠테타를 일으켜 탄핵 시킨 것이기에 더더욱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사들이 일본과 싸웠다고 주장을 하지만 그것이 우리 민족을 위한 독립투쟁이었는지 레닌과 스탈린의 지령 및 자금을 받고서 소련의 입장에서 일본군과 싸운 것인지는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구분은 명확하지가 못한 상황입니다.
1921년 6월 28일 발생한 '자유시참변'으로 일본군과 대항하여 싸우던 대한독립군단 3500명이 모두 소멸되었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사들이 무장투쟁으로 일본과 싸웠다는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외교독립은 미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진두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시킨 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을 위해 외교전을 펼쳤다는 말도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탄핵을 시키고 소비에트체제의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사들은 소련을 위해서 활동을 한 셈이 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민족의 지도자로 둔갑을 하고 이들이 남한에 들어와서 만든 것이 '남로당'입니다.
대한민국의 종북주사파들이 김구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가 여기서 비롯됩니다. 소비에트체제로 개헌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김구인 것입니다.
레린과 스탈린이 철저하게 민족주의자들을 모두 숙청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사들을 살려 두었다는 것은 그들이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소련을 위해서 일하는 충실한 일꾼이었다는 의미가 성립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었던 인사들이 해방 이후 민족지도자, 독립투사 행사를 하며 소련군 대위였던 김성주(독립운동가였던 ‘김일성’으로 훗날 이름을 바꿈)와 함께 북한지역에서 설립한 것이 ‘조선인민민주의공화국’(일명 ‘북한공산당)이었고, 이들이 남한지역으로 들어와서 만든 것이 남조선로동당(약칭 ’남로당‘) 이었습니다.
1946년 미 군정청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78%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지했다고 합니다.
일제에서 해방이후인 1946년 2월에 벌써 북한지역에서는 국회에 해당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됩니다. 이미 소련의 사주를 받은 김성주(김일성으로 개명)가 벌써 국가건설 작업에 착수한 것입니다.
일제에서 해방된 이후 남과 북은 공통적으로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북한은 1947년 12월에 비밀리에 화폐개혁을 한 후, 폐기된 구권을 남한지역으로 어선을 이용해서 밀반입한 후 친북성향의 언론사 10개를 세우고 남한내에서 각종 친북한 여론을 만들어 냅니다.
이 모든 것을 주관한 인물이 간첩 성시백이었는데, 그는 군인, 외교관, 경찰, 국회부의장, 정치인, 시민단체 등에게 이런 불법 자금을 지원하여 친북세력으로 만듭니다.
1946년 3월 20일 1차 미소공동회담에서 소련은 ’우익은 제외하고 임시정부를 만들자‘고 주장하고, 미국은 ’좌우 함께 임시정부를 만들자‘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미국이 제시한 좌우합작 임시정부 설립안을 반대합니다. 이미 1920년대에 공산주의자들의 수법에 탄핵을 당한 바가 있었기에 결사 반대를 하였습니다.
1920년대부터 레린의 자금을 받고 충성맹세를 했었던 김규식, 여운형 등은 미국이 제시한 ’좌우합작 임시정부안‘을 찬성합니다.
이 과정에서 간첩 성시백이 북한에서 가져온 자금으로 설립한 언론사, 시민단체, 정치단체 등이 이승만 박사를 비난하는 등 북한에 유리한 여론을 만듭니다. 이미 간첩 성시백의 공작에 넘어간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세력들이 북한에 동조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몇 차례의 더 개최되었던 미소공동회담이 완전히 결렬된 후, 1947년 9월 17일 우리의 문제가 UN 총회로 넘어갔습니다.
이때, 유엔총회에서 소련은 ’한반도에 있는 모든 외국군 동시 철수‘를 주장하였는데, 소련은 두만강을 넘어갔다가 금방 한반도로 진입할 수 있었던 반면, 미국은 바다 건너 일본으로 철수하면 한반도 재진입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에 소련은 일단 철수하는 척 했다가 한반도를 모두 점령할 목적으로 이런 주장을 한 것입니다.
반면 미국은 ’남북한 단일 선거’를 주장하였습니다.
북한은 남북한 동시 단일 선거를 반대하였고, 김구 선생도 북한의 입장에 서서 선거를 하지 말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소비에트체제의 개헌을 한 바 있으며, 소비에트체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주석에 오른 바 있었기에 북한 측 입장에 동조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이미 북한지역은 소련체제의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설 준비가 다 되었으니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해서 자유국가를 만들고 북한지역의 소련을 몰아내고 자유민주주의로 통일을 하자고 주장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런 발언으로 남북통일을 방해한 사람으로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1946년 2월에 이미 북한지역에서 우리의 국회격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기 때문에 남북 분단의 주범은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라 북한 김성주(김일성으로 개명)였습니다.
이런 혼란한 과정을 거치면서 1948년 5월 10일 자유총선거가 남한지역에서 치루어지게 결정되었습니다.
5월 10일 자유총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갖고서 북한과 연계한 남로당과 좌익세력들이 제주도에서 일으킨 사건이 제주 4.3사건인 것입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기해서 제주도 새별오름에 좌익세력들이 ‘봉화’를 올리고 이를 신호로 전 제주지역에서 공산폭도들에 의한 방화, 살인, 납치, 강간, 약탈 등이 자행되었습니다.
제주도의 공산주의 세력들은 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을 죽이고 경찰 복장으로 갈아 입고 무기고를 탈취하여 제주 전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을 쏘아 죽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들은 적기가를 부르고 제주KBS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도 하였습니다.
우리 군과 경찰이 투입되어 이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우리 군의 박진경 대령이 공산주의 를 추종하는 부하에게 암살되는 등의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공산폭도들은 한라산을 근거지로 많은 주민들을 약탈, 방화, 살인, 강간 등 사람으로서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제주 4.3 사건 당시 공산폭도들은 옆 동네에 성도 집에 심방을 다녀오던 이도종 목사님을 납치하여 자신들의 혁명이 성공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을 하였으나 이도종 목사님이 거절하자 이도종 목사님을 산채로 생매장을 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도종 목사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폭도들에게 성경책과 회중시계를 주면서 하나님 믿고 천국가라고 말을 남긴 후 기도하는 자세로 생매장을 당했습니다.
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많은 군인, 경찰 및 무고한 시민들이 죽었습니다. 제주 4.3사건의 총사령관 이덕구는 한라산 중산간에 은신처를 만들고 생활하면서 폭동을 지휘하였고, 김달삼은 투표용지 수 만장을 훔쳐서 모슬포항에서 북한으로 월북하였습니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김구 선생은 간첩 성시백과 접선한 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을 하고 1948년 4월 30일 ‘남조선 단독 선거의 결과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문구가 담겨진 공동 선언문에 서명을 하고 발표를 합니다.
김구 선생은 북한 방문 시 이미 북한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직접 목격하였지만 남한으로 내려온 후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을 해 주지 않았고, 대만 외교관 출신 유어만이 ‘왜 건국을 반대하는가?’고 질문을 하자 북한의 전쟁 준비 사실을 살짝 공개하였습니다.
소련의 지령을 받은 북한지역의 공산주의 세력과 남한지역의 남로당 공산주의 세력들은 해방 이후 1946년 10월 1일 대구폭동을 일으켰으며,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 여수와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를 제주도에 투입하려 하자 1948년 10월 19일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여수·순천 반란사건’입니다.
제주 4.3 사건과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확실하게 진압하지 못하였다면 1950년 6.25일 북한의 기습 남하로 시작된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은 버티지 못하고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남로당의 후예들은 6.25이후 통혁당, 인혁당 사건 등 남한내 지하당을 만들었으며 남로당의 후예들이 1980년대 ‘학생운동’ 혹은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남한내 체제전복 운동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북한식 공산주의 혁명을 위장하기 위하여 '민주화운동' 이라는 명칭을 붙였습니다.
이들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정당을 만든 것이 현재 통합진보당(헌법재판소에 의해서 강제해산), 정의당, 더불어민주당 등 종북좌파 정당입니다.
이들은 ‘민주’, ‘정의’, ‘진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용어로 위장하고 있지만 북한 인권유린에 침묵하고 친북사대, 친중사대 행위를 하는 등 비민주적인 행동, 반헌법적인 행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추미애 대표는 2017년 12월 3일 중국공산당이 북경에서 주최한 국제공산당 정당대회에 참석하여 기조연설을 하였으며, 더불어민주당의 민주연구원 양정철 원장은 2019년 7월 10일 북경에서 중국공산당 당교와 정책협약을 맺었습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은 해방 공간에서 존재했었던 남로당의 후신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상황입니다.
1946년 10월 1일 있었던 대구폭동의 전개과정은 1980년에 있었던 5.18 광주사태와 전개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며, 이명박 정부시절 ‘광우병폭동’과도 진행과정이 매우 유사합니다.
현재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민주당 그리고 여당 성향의 시민단체들은 제주 4.3사건을 ‘국가에 의한 폭력’으로 규정하고 제주도 전 지역에서 역사 왜곡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제주4.3사건 특별법’을 만들어 그 당시 공산폭도들을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둔갑키시고 가해자의 가족들에게 보상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 법안은 2021년 2월에 더불어민주당에 의해 통과되었으며, 보상금 집행만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기독자유통일당은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고 공산주의 폭동을 일으켰던 세력들에게 국민의 혈세로 막대한 보상을 해 주려는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민주당을 국제공산당으로 규정하며 이들의 대한민국 해체 공작을 끝까지 막아낼 것을 대한민국 국민들께 다짐합니다.
기독자유통일당 대변인실
(사진자료 출처 : 하늘교회(담임목사 김재동) 자유리더캠프 교육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