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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위산업의역사(방산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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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14), 방산기술의 발전

방산백서 제1부(14), Chapter 2 '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




방산전문 매체 '글로벌디펜스뉴스'는 '한국방위산업학회(회장 채우석)'가 지난 2년간 집필한 '방위산업 40년, 끝없는 도전의 역사' (이하 '방산백서')를 전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하여 방위산업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래의 전문은 '방위산업 40년, 끝없는 도전의 역사' (이하 '방산백서')의 원문이며, 한국방위산업학회의 동의 하에 게재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자주국방을 위해 방산제품 개발에 참여한 민·관····연 관계자와 방산제품 시험 도중 부상 당하거나 순직하신 모든 분들께 격려와 위로의 박수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제1부 요약>


제1부에서는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태동부터 현재의 방위산업에 이르기까지 방위산업과 관련된 주요사건과 이슈 중심으로 정리했다. 우리나라 방위산업은 1960년대 말부터 있었던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과 주한미군 철수 등 한반도 안보환경의 불안정을 극복하고 자주국방을 실현하려는 의지와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창설하고 이어 한국의 최초 방위사업이라 할 수 있는 번개사업과 1차 율곡사업을 시작하여 짧은 기간에 미사일까지 개발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기반이 된 중화학공업은 곧 방위산업을 위해 육성되었고 방위산업과 함께 발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미사일 개발이 중단되고 국방과학연구소가 축소되는 등 시련의 과정이 있었으나, 2・3차 율곡사업을 통해 방위산업의 기반이 다져지고, 한국형 정밀무기 개발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었다. 율곡감사는 방위사업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고, 각 정부별로 이루어진 국방개혁과 획득제도 개선 및 방위력개선사업을 통해 방위산업은 내실을 다지면서 첨단화를 지향해왔다. 2006년 방위사업청의 설립으로 방위산업은 개방과 경쟁의 장(場)으로 진입하는 변혁을 겪게 되었고 국제경쟁력 강화를 모색하는 과정에 있다.






Chapter 2 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

14. 방산기술의 발전

역설계와 모방개발

번개사업을 추진할 당시의 우리 방산기술 수준은 수류탄이나 지뢰와 같은 간단한 탄약류를 제조할 수 있는 정도였고, 총기, 화포 등 정밀기계가공이 요구되는 병기의 개발능력은 없었다. 번개사업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병기개발은 역설계(reverse engineering)에 의한 모방개발 개념을 도입했다. 미제 박격포의 제원을 가져와서 구경, 포신 길이 및 무게의 치수와 형상을 그대로 적용하여 주물을 만들어 박격포를 제작했다.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박격포 개발에 참여했던 민성기 박사(예비역 육군 준장)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60mm 박격포를 그렇게 제작하여 다락대에서 시험사격을 했는데 포탄이 비행 도중에 추락하고 사거리가 미제의 절반밖에 나오지 않았다. 원인을 알 수가 없어서 고민을 하다가 할 수 없어서 미제 박격포 실물을 가져와 세밀하게 비교해보니 우리가 제작한 박격포의 포신 길이가 미제보다 1.5cm나 짧았던 것이었다. 알고 보니 미제의 치수는 인치(inch)로 나와 있는데 인치를 미터법로 환산할 때 1inch=2.54cm에서 소수점 둘째자리의 0.04를 무시하고는 2.5cm로 환산했던 것이다. 그러니 37인치 길이에서 1.5cm의 오차가 발생하여 사거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치수를 정확하게 산정하여 제작한 박격포는 사거리가 미제 장비보다 더 정확하게 나왔다. 제는 오래되어 닳았고, 우리가 제작한 것은 새 장비였기 때문이다.” 






60mm 박격포에 이어 81mm 박격포 개발도 성공적이었다. 4.2인치 박격포도 자신감을 갖고 개발했다. 그런데 4.2인치 박격포를 시험사격할 때는 포탄이 공중에서 회전하더니 그대로 수직낙하 해버렸다. 이 역시 아무리 분석을 해도 원인을 알 수가 없어서 결국 미제 실물 장비를 가져와 세밀하게 비교하는 작업을 했더니 포신 내 강선의 각도가 미세하게 차이가 났다. 당시 60mm・81mm・4.2인치 박격포는 모두 강선포로 제작되었다. 

강선포는 포신의 내벽에 나선형으로 강선을 깎아 넣음으로 포탄이 포신을 빠져나오는 동안 강하게 회전하게 되고, 그 회전력으로 비행속도와 방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활강포는 강선이 없고 포탄에 날개를 달아서 방향을 유지한다. 그런데 비교해보니 60mm와 81mm 박격포는 강선이 포신 바닥에서 입구까지 균일한 각도의 나선형 구조로 되어 있었는 데 반해, 미제 4.2인치 박격포는 3단계 각도의 나선형 구조로 되어 있었다. 

60mm와 81mm 박격포는 포신 길이가 짧아서 한 가지 각도의 균일한 나선형 강선으로 충분했지만, 4.2인치 박격포는 구경이 크고 포신이 길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균일한 한 가지 각도의 강선 구조로는 가속도를 제대로낼 수 없었고 포구속도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4.2인치 박격포는 나선형 각도가 단계적으로 가파르게 변하는 3단계 나선형 구조로 만들어서 포탄이 포신 내에서 세 번의 굴곡점을 지나면서 점차 가속력이 증가하여 포구속도가 최대로 나오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를 발견하여 시정한 결과, 사거리가 정확하게 나오도록 하는데 성공했다.79 이처럼 우리나라 병기개발의 1단계는 미제 병기의 역설계에 의한 ‘모방개발’이었는데, 이때는 모방의 대상이 되는 원래 병기의 치수와 형상을 오차 없이 정확하게 모방하는 것이 중요했고,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병기를 대상으로 가능했다.


하딘팀의 기술지원

번개사업 1차 시제품은 어떻게든 만들었는데, 2차 시제품은 수량이 많아서 설계도면과 좀 더 정확한 사양이 필요했다. 국방과학연구소 신응균 소장은 주한미대사관에 요청하여 기술지원을 받고자 했다.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주한미대사와 미 국무부는 기술지원 요청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미 국방부의 생각은 국무부와는 좀 달랐다. 미 국방부는 한국이 기본병기의 생산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미 국방부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군은 모두 미제 구식 병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모두 도태되었고 부품 생산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 병기에 대한 수리 및 보수는 한국군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또한 이 병기들은 전 세계의 후진국에서는 아직도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나라에선가는 수리부속품을 만들어서 공급해주어야 한다. 이번 기회에 한국이 생산하도록 하는 것이 미국의 안보전략상으로도 유리하다. 그리고 한국에서 병기를 생산하게 되면 그만큼 미국의 방위원조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방산업체를 미국 방산업체의 계열화 공장 형태로 발전시키면 미국 방산업체에 대한 피해는 없을 것이다. 또한 한국 방위산업의 범위를 방어용 무기로 한정한다면 미 국무부의 의도에도 배치되지는 않을 것이다” 

미 국방부가 이러한 견해를 가지게 된 데는 미 고등연구계획처(ARPA;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후에 DARPA로 개칭)의 한국지부 책임자인 미 공군 패터슨(Patterson) 대령의 자문과 역할이 컸다. 이러한 미 국방부의 입장이 받아들여져서 1971년 6월 1일 미 태평양사령관의 과학고문인 깁슨(Gibson)을 단장으로 하는 미국의 기술조사단 7명이 한국을 방문하여 1주일간 체류하면서 방산기술 수준과 지원사항 등을 조사하게 된다. 

그 결과로 1971년 7월 13일 한미 국방장관회담에서 국방과학연구소 기술지원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합의에 따라 1972년 1월 7일 미 국방부의 고등연구계획처(ARPA)에서 클라이드 하딘(Clyde D. Hardin)을 단장으로 하는 기술지원단(Defense RDT&E Counter Part Group)을 국방과학연구소에 파견하게 된다.





하딘(Hardin)은 전자전 전문가로 미 육군성 연구개발 및 획득차관보의 동남아 담당 특별보좌관이었고, 팀원은 총포/탄약 담당 얼릭(Ulrich), 항법/사격통제장치 담당가드너(Gardner), 기동장비 및 로켓 담당 샌즈(Sands), 전자/통신 담당의 앤델(Andel)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하딘팀 혹은 ARPA팀이라고도 불렸는데, 어떤 이는 6개월, 어떤 이는 2년간 국방과학연구소에 상주하면서 설계도면을 포함한 각종 기술자료를 제공했다. 

또한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의 미국 군 관계 연구소 방문 및 연수를 도와주는 등 국방과학연구소의 병기개발을 지원했으며, 번개사업 2차 시제품 제작을 비롯한 우리나라 초기의 병기개발에 공이 컸다. 이들은 너무 많은 기술자료들을 제공해 주었다는 이유로 문제가 발생하여 1974년에 해체되어 철수했고, 주한미군합동지원단(JUSMAG-K)이 그 역할을 넘겨받았다.


생산공정기술

1972년 4월에 박 대통령은 105mm 곡사포를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05mm곡사포 개발은 소총이나 박격포 개발과는 차원이 다르다. 106mm 무반동총까지는 제작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4.2인치 박격포나 106mm 무반동총은 보병이 운용하는 화력장비이기 때문에 구조가 간단하고 제작도 쉽다. 그러나 곡사포는 포병이 운용하는 고급 화포이다. 포신의 강도와 내구성, 포신 내부 가공 정밀도 등의 측면에서 차원이 다르고 전문적인 기술과 장비가 있어야 한다. 특히 발사 에너지를 흡수하는 주퇴복좌기 기술이 있어야 한다. 

당시만 해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기술이었다. 국방과학연구소의 구상회 박사가 당시 국방과학연구소에 파견된 미국 기술고문단장인 하딘에게 곡사포 기술자료를 달라고 하자, 하딘은 껄껄 웃으며 0“15mm 곡사포는 카빈총과는 다르다. 기술자료의 분량만 해도 방 하나쯤 될 것이고, 자료 검토에만 1년은 걸린다”고 말했다. 미국 대사관은 하딘에게 우리나라의 곡사포 개발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아무튼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미제 105mm 곡사포의 치수를 재어서 역설계하는 방식으로 설계를 했는데, 6・25전쟁 이전부터 사용하던 고물들이라서 마모가 심해 정확한 치수 측정도 어려웠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작업에 들어갔다. 포신 제작은 대한중기가, 주퇴복좌기 제작은 대동공업이 담당하여 개발에 착수했다. 우여곡절 끝에 11개월 만에 시제품을 제작하여 1973년 3월에 연구소 자체 시험사격을 했는데,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83 소화기와 박격포 같은 비교적 단순한 병기의 제작 단계에서 벗어나 기술적・공학적인 난이도가 다른 대형 화포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국방과학연구소의 자체 시험사격이 성공하자 대형 화포 개발에 고무된 박 대통령은 시범사격을 지시했다. 1973년 6월 25일 다락대에서 대구경 화포인 105mm 곡사포, 106mm 무반동총 및 4.2인치 박격포를 대상으로 시범사격을 계획했다. 그런데 시범사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105mm 곡사포 주퇴복좌기의 유체가 새는 현상이 나타났다. 

포탄이 발사되는 순간 발생하는 엄청난 압력과 충격을 주퇴복좌기의 유체와 질소가스가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 유체가 새는 것은 주퇴복좌기 실린더의 내경과 피스톤의 외경이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고 미세하게 간격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때 주퇴복좌기의 공차는 100만 분의 1인치의 정밀도로 거울처럼 완벽하게 가공되었고 치수도 정확했기 때문에 가공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공을 하는 방향, 즉 수평 호닝(honing) 가공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즉, 주퇴복좌기 원통형의 구멍을 깎을 때 몸체를 수평으로 놓고서 드릴의 방향을 통상적인 방식대로 수평방향으로 깎아 들어갔던 것이다. 실린더 드릴은 매우 무겁기 때문에 드릴이 수평으로 진행하면서 중력으로 인해 조금씩 미세하게 처지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깎임에 차이가 발생했다. 그러다 보니 원통을 수평으로 눕혔을 때 양끝 지점의 수평높이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게 되었고, 그에 따라 유체가 새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래서 가공 공정을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수직 호닝 방식으로 바꾸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이나 선진국에서는 당연히 수직방향으로 가공하는 것이 상식이었다고 한다. 생산공정과 생산기술의 중요성을 깨우쳐준 사건이었다. 설계기술이 성숙되기 전에 생산공정에 관한 기술 문제가 대두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TDP 개발

1973년 6월의 시사회가 끝나고 나서 필립 하비브(Philip Habib) 주한미대사가 몽고메리(Montgomery) JUSMAG-K의 R&D 담당관을 통해서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에게 국산 105mm 곡사포 각 부위의 수치가 미군의 규격과 맞지 않는다면서 국산포의 문제점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했다. 오 수석은 “설계도면이 없으니 당연하다. 도면만 있으면 똑같이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미국이 설계도면을 지원해주지 않으면 다른 나라를 통해서라도) 화포는 국산화하겠다”라고 대답했다. 

한국 측의 화포 국산화 의지가 강경하다고 판단한 미국은 우리에게 기술자료를 제공하는 문제에 대해 협의를 시작했고, 그해 9월 6일 합의에 도달하여 유재흥 국방부 장관과 리처드 스틸웰(Richard Stilwell)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미간 ‘군 병기, 장비 및 물자에 관한 기술자료 교환 부록’에 서명했다. 





같은 해 9월 12일~13일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에서 미국의 윌리엄 클레멘츠(William P. Clements) 국방부 차관은 “한국의 방위소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산업기반을 발전시키기 위해 미국의 산업기술과 한국의 산업을 결부해 활용하는 공동 노력의 필요성을 권고하고, 이 분야의 적절한 원조를 제공하도록 노력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이것은 한국이 무기개발을 하려거든 단독으로 하지 말고 미국과 공동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1974년부터는 105mm 곡사포를 비롯한 각종 병기에 대한 기술자료(TDP; Technical Data Package)를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고, 개발 속도가 빨라졌다.

이렇게 하여 ‘모방개발’과 함께 우리나라 초기의 무기개발 형태의 하나인 ‘TDP에 의한 개발’이 시작되었다. 105mm 곡사포 개발로 습득한 정밀가공기술과 생산공정기술은 민수 분야의 정밀공작기계 제조 분야에 즉각적으로 적용되어 우리나라 정밀기계공업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방위산업을 국가기관이 전담하지 않고 민수업체가 참여하도록 했기 때문에 방산기술의 민수 전환이 매우 쉽게 이루어졌다.


기술습득의 값비싼 대가

국산 20mm 발칸포의 시험사격 과정에서 청와대 이석표 비서관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산 발칸포를 개발하고 수십 발씩 시험사격을 여러 차례 했는데, 모두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사격 발수를 늘려서 수백 발씩 실전과 같은 시험사격을 할 때에는 탄약이 자꾸만 약실 입구에서 엉키는(jamming) 현상이 나타나면서 실패를 하는 것이었다. 

다락대에서 시험사격을 할 때에도 엉키는 현상이 나타나서 사격이 중단되고 연구원들과 사격수들이 엉킨 탄약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는데, 뒤에 있던 이석표 청와대 비서관이 어떻게 된 것인지 보려고 다가와 탄약뭉치를 들여다보는 순간에 엉켜 있던 탄약이 폭발해버렸고, 그로 인해 현장에서 이 비서관이 사망했다. 나중에 분석된 재밍의 원인은 ‘과열현상’ 때문이었다. 수십 발씩 사격할 때까지는 과열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수백 발을 순식간에 연발사격하다 보니 발열 통제가 안 된 것이었다. 

포신이 300도 이상으로 과열되다 보니 탄약장전실이 팽창되어 탄약이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장전이 안 되니 밀려들어가는 탄약들이 엉켰고, 장전실에 끼어 있던 탄약이 고열을 받으면서 폭발한 것이었다. 거의 모든 병기가 내열 구조와 내열재질을 필요로 하며, 그에 따른 기술이 요구된다. 값진 희생을 치르고 기술을 습득하게 된 사례였다.


체계개발의 개념 습득

K200 한국형 장갑차 개발은 ‘체계개발’을 경험한 사업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장갑차는 이탈리아 피아트(Fiat) 6614 장갑차를 모방하여 1976년부터 1978년까지 개발한 경장갑차 CM6614이었다. CM6614는 기아자동차에서 생산하던 ‘복서’라는 화물차의 엔진과 트랜스미션에 피아트 6614를 모델로 국내에서 개발한 장갑차체를 얹은 것이었다. 이 장갑차는 전투용보다는 후방지역 대(對)게릴라 작전용으로 사용되었고박 대통령의 서거 이후 생산이 중단되었으나, 개발하는 과정에서 장갑 소재와 용접기술 등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1979년에 신규 장갑차 소요가 제기되었으나 당시 육군에서는 미국의 M114 장갑차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거의 결정이 된 상황이었다. 국방과학연구소의 개발 담당자였던 민성기 박사가 당시 국보위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찾아가서 국산 개발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획득방법을 국내 개발로 전환함으로써 K200 한국형 장갑차 개발이 착수되었다. CM6614는 차체와 바퀴를 중심으로 국내 개발이 이루어졌지만, K200 장갑차는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포함한 동력, 장갑, 무장 등을 모두 국내에서 개발했다.

K200 장갑차는 역시 형상은 피아트 장갑차를 모델로 했으나 기본적으로 국내 기술로 개발했고, 각종 구성품을 개발하여 체계를 조립하는 형태의 대형 체계개발사업 개념이 사실상 처음 적용된 무기체계이다. 1970년대에는 백곰 유도무기를 제외하고는 병기의 설계를 미군의 TDP에 의존했고 모방개발이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 생산기술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K200 장갑차부터는 한국형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설계에 따른 체계개발이 수행되었고, 체계설계 기술의 의미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장갑차의 개발과 생산기술은 민수분야에서 장갑차와 유사한 동력장치와 궤도 및 차륜을 필요로 하는 불도저, 페이로더 등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우리나라 중장비공업의 발전으로 즉각 연결되었다.


지적소유권 및 ILS의 개념 인식

1970년대 말에 북한이 소련제 최신형 전차인 T-62를 보유했다는 첩보가 있어서 우리나라도 전차 개발에 대한 필요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미제 M48A1 전차를 개조하여 105mm 주포를 장착한 M48A5K가 최신형이었다. 박 대통령은 1975년 7월 국방부에 전차 개발을 지시했다. 국방부는 1976년 12월 전차사업관리단을 설치하고 고도웅 대령을 단장으로 하여 전차개발사업에 착수했다. 

차는 주포가 있어서 장갑차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무기였기 때문에 신형 전차를 개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미국 측에 M60 패튼 전차의 면허생산을 요구했다. 미국은 북한의 위협이 현실적으로 높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어쩔 수 없이 국방부가 독일 크라우스-마파이(Krauss-Maffei)사의 레오파드를 기술협력 하에 생산하기로 협의하고 계약을 체결하려는 순간에 미국이 태도를 바꾸어 자기들이 책임지고 한국형 신형 전차 개발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미국 측은 ROKIT(Repulic Of Korea Indigenous Tank: 한국형 차기 전차)를 개발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덕분에 M60 패튼 대신에 최신형인 M1 에이브람스(Abrams) 전차를 모델로 개발하는 것으로 하여 미국 크라이슬러 디펜스(Chrysler Defense)사를 협력업체로 선정하고 1978년 5월 한미 정부 간 한국형 전차(ROKIT) 개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1981년 12월에는 미 크라이슬러 디펜스사에게 6,000만 달러를 지급하고 시제품 개발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미국에서 크라이슬러 디펜스사와 협상을 하고 가계약을 체결했던 국방부 2차관보와 K1전차사업단장이 귀국하자마자 보안사의 조사를 받고 보직 해임되었다. 알고 보니 미국 측과의 가계약서에는 K1 개발에 관한 지적소유권이 모두 미국 정부에 귀속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정부가 100% 자금을 투입하여 개발하는 사업인데 그 기술소유권을 미국 정부가 가지도록 했으니 우리 정부로서는 난리가 난 것이다. 당시 계약에 대한 전문성 부족으로 치밀하게 검토하지 못한 결과였다. 결국 불리한 조항을 일부 수정하는 선에서 계약을 체결했으나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K1은 우리 마음대로 수출할 수 없는 장비가 되었다. 이러한 잘못은 나중에 K2(흑표)를 전적으로 독자개발하면서 해소되었다.

아무튼 미 크라이슬러 디펜스사는 계약 후 바로 개념설계와 탐색개발에 착수했다. 개발 비용을 줄이고 성능을 담보하기 위해 차체를 기존의 M1보다 줄이고 가스터빈엔진 대신 독일산 디젤엔진을 탑재하고 유기압식 현수장치(HSU)를 사용하는 쪽으로 설계했다. 국방과학연구소와 현대정공(현대로템)이 체계개발을 수행하면서 기술을 이전받는 형태로 개발이 이루어졌다. 1981년 12월 선행 개발에 들어가 1984년 4월 2대의 전차 시제품을 제작했다. 

국내에서도 현대정공이 미국의 기술지원으로 5대의 전차를 생산했다. 1985년 11월 3대의 전차가 군에 배치되어 군 운용시험에 투입되었고, 나머지 2대는 국방과학연구소에 인도되어 기술시험에 들어갔다. 1985년에 개발이 완료되어 1987년 7월부터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1987년 9월 17일에는 육군 승진 사격장에서 전두환 대통령 참석 하에 성능시범을 실시했는데, 88올림픽 개최를 기념하여 ‘88 전차’라고 명명되었다. 

1987년 210대를 시작으로 1997년까지 총 1,027대가 양산되어 4개 기계화보병사단과 3개 기갑여단에 배치되었다[초기형 가격은 23억 원, 후기형인 로트(LOT)4형 가격은 35억 원]. 크라이슬러 디펜스사는 나중에 제너럴 다이내믹스(General Dynamics)에 매각되어 GDLS(GD Land System)로 바뀌었다. 

K1 전차는 최초로 ILS(Integrated Logistics Support: 종합군수지원요소) 확보 개념이 적용되어 개발된 무기체계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ILS는 반드시 무기체계 개발과 함께 개발되어 무기체계의 운용 단계에서 적용해야 하는 요소이다. 그러나 이전에는 무기체계 본체 개발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ILS 개발에는 소홀했을 뿐만 아니라 ILS에 대한 개념도 희박했다.

K1 한국형 전차를 개발할 때에는 ILS의 개념을 소개받고 크라이슬러 및 GDLS와 전차의 ILS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고, 품질관리를 포함한 생산 전(全) 수명주기에 대해 ILS 개발개념을 적용했다. 이로써 다른 무기체계 개발사업에도 ILS 개념이 적용되게 되었고, 연구개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지적재산권과 ILS에 대한 개념에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핵심기술 확보의 중요성, 도전과 실패를 거친 성공

K2(흑표) 전차는 K1 전차와 K1A1 전차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순수 국내 기술력으로 개발한 세계 최고 성능의 전차이다. 120mm 활강포에 모듈식 복합장갑과 반응장갑을 부착하고, 반능동유기압식 현수장치를 장착했으며, 능동파괴체계까지 장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1995년 7월 기초연구에 착수했고, 1998년 11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탐색개발을 수행한 후 2003년 1월부터 ‘체계개발’에 착수하여 4년여 만인 2007년 3월에 완성된 시제품을 내놓았다. 개발 주관은 국방과학연구소가, 시제품 제작은 현대로템이 담당했다. 시험평가가 완료되면 2012년부터 양산에 착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시험운전을 하는 과정에서 국산 개발 파워팩(power pack: 엔진 및 변속기)에 결함이 발생했다. 고속 주행 시의 엔진 과열 현상과 파워팩 베어링의 내구성이 문제였다. 파워팩은 두산인프라코어가 엔진을 개발하고, 변속기는 S&T중공업이 개발하여 두산인프라코어가 통합을 한 것이다. 수차례 설계 보완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실패로 전력화가 늦어지자, 방위사업청은 2012년 4월에 1차 양산분 100대는 독일산 MTU사의 파워팩을 장착하여 전력화하고, 파워팩 개발은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1차 양산 전차는 2014년 4월부터 대한민국 육군에 인도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2014년 9월에는 국산 파워팩의 모든 문제점을 해결하고 시험평가를 성공적으로 통과함으로써 마침내 개발에 성공했다. 세 차례나 개발 기간이 연장되는 등 차질을 빚었지만, 결국 사업 시작 9년 6개월여 만에 결실을 맺었다. 후속 양산 물량에는 모두 국산 파워팩을 장착할 예정이다. K2 흑표 전차의 기술은 일찌감치 2008년에 터키에 수출되었다. 

물량 수출은 없이 기술만 수출했고, 터키는 이전받은 기술을 활용하여 자국산 알타이(Altay) 전차를 개발했다. 흑표 파워팩 개발이 지연되면서 터키 알타이 전차는 흑표보다 먼저 사우디아라비아에 수출되었다. 사실 2002년경 K2 전차 개발 착수를 검토할 때, 1,500마력 파워팩의 국내개발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엔진과 변속기 기술은 핵심적인 기술로 결코 쉽지 않은 데다가 처음 개발에 도전하는 상황이었고, 독일조차도 MTU 엔진을 개발하는 데 15년이나 걸렸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개발 기간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국방부 연구개발관실은 만약 엔진 개발이 지연될 경우 초기 양산 제품에는 독일제 엔진을 쓰는 것으로 하면 될 것이니, 전차 기술의 독립과 수출을 위해서는 국내개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국내개발을 결정한 것이다.

전차 체계를 국내에서 개발하더라도 핵심 구성품인 파워팩을 독일 TMU 제품으로 쓰게 되면 기술이 종속될 뿐만 아니라 그 비용이 전체의 20~25%를 차지하기 때문에 여간 부담이 되는 게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흑표 개발에 성공한 것은 엄청난 쾌거였다. 흑표 전차 개발은 무기체계 개발에서 핵심기술 확보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흔히 무기체계 개발에서 핵심기술 때문에 발목이 잡히는 경우가 있는데, 개발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대체로 아예 외국 부품을 도입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 

흑표 전차 파워팩의 경우는 실패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고 도전적인 정책결정을 통해 결국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흑표 전차의 개발 실패 문제가 그동안 자주 언론에 오르내렸지만, 사실 개발 과정에서 실패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결국은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하고 증명한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초의 불확실한 여건에서 국내개발 우선이라는 정책적 판단에 따른 의사결정은 매우 잘 한 것이었고, 개발 기간의 지연이나 다소의 비용 증대는 개발 성공에 비하면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 전편 - 율곡사업(‘국방 8개년 계획’)과 기본병기 국산화 >
< 다음편 - 방산기술인력 양성 >


                                           < 연 재 순 서 >


PART 1 방위산업의 역사 / 서우덕 •16

Chapter 1 방위산업이 태동되기까지 •19

1. 1・21사태(김신조사건)•19
2. 미국 푸에블로호 납치사건•21
3.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23
4. 미군 정찰기 격추사건•24
5. 닉슨 독트린과 주한미군 철수•26
6. 자주국방과 방위산업: 불가피한 선택•29


Chapter 2 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31

1. 방위산업을 향한 첫발•31
2. 국방과학연구소(ADD)의 창설•35
3. 최초의 방위사업: 번개사업•47
4. 초기 방위산업 시설 및 공업단지•51
5. 방위산업 육성의 밑그림과 제도 구축•55
6. 우리나라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64
7. 율곡사업(‘국방 8개년 계획’)과 기본병기 국산화•81
8. 방산기술의 발전•90
9. 방산기술인력 양성•102
10. 한국방위산업진흥회의 설립•111



Chapter 3 방위산업의 시련과 도전•119

1. 핵개발•119
2. 미사일 개발•127
3. 전두환 정권과 국방과학연구소의 구조조정•141
4. 획득환경과 제도의 변화•144
5. 2차 율곡사업과 한국형 무기체계 개발•146


Chapter 4 방위산업의 안정과 성장•149

1. 3차 율곡사업과 첨단전력 확보•149
2. ‘818 군구조 개편’과 전력・획득조직 개편•151
3. 한국방위산업학회의 설립•153
4. 율곡사업 감사•158
5. 국외도입사업과 무기중개상•164
6.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의 방위력개선사업제도 개선•168


Chapter 5 방위산업의 경쟁과 도약•178

1. 국방획득제도개선과 방위사업청 신설•178
2. ‘국방개혁 2020’과 전력증강 방향•184
3. ‘국방개혁 307계획’•189
4. 방위산업 신경제성장 동력화•192
5. 업체 주관 개발의 활성화와 글로벌 도약의 시작•915
6. 방위사업의 투명성•198
7. 방위산업은 그래도 꿋꿋하다•201



PART 2 방위산업의 발전과 성과 / 서우덕.장삼열 •202

Chapter 1 방위산업 정책 및 제도의 변천•205

1. 방위산업 발전의 시대 구분•205
2. 역대 정부의 방산 육성정책•209
3. 국방획득조직의 변천•225
4. 국방획득 의사결정 기구의 변천•245
5. 방위사업수행체제의 발전•251
6. 방위산업 보호·육성정책•261
7. 방위산업의 개방 및 경쟁체제화•274


Chapter 2 분야별 방위산업 형성과 발전•283

1. 탄약 업체•283
2. 기동・화력장비 업체•288
3. 함정건조 역사와 함정 업체•296
4. 항공기 생산・정비 업체•308
5. 유도무기・로켓 업체•321
6. 통신장비 업체•327
7. 지휘통제(C4I)체계/전투체계 업체•333
8. 감시정찰 분야 업체•338
9. 화생방 분야 업체•344


Chapter 3 방위산업의 성과•346

1. 국산 명품 무기체계•346
2.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현황 및 위상•349
3. 방산수출•356
4. 방위산업의 기술파급 및 산업파급효과•360


Chapter 4 우리 방위산업의 특징과 발전 방향•372

1. 우리 방위산업의 특징•372
2. 방위산업 발전 방향과 전망•377



PART 3 국산 무기체계의 개발 / 신인호 •380

Chapter 1 소화기•383

1. 개인화기•383
2. K3 / K12 / K6 기관총•388
3. 유탄발사기와 소총의 복합화•393
4. 복합형 소총 - 세계 최초 개발•936
5. 특수목적 소총과 권총•399

Chapter 2 화력무기•402

1. 견인포•402
2. 자주포•408
3. 탄약운반장갑차•420
4. 박격포•423
5. 다연장로켓•428

Chapter 3 기동무기•432

1. 전차•432
2. 장갑차•450
3. 차륜형 장갑차•473
4. 상륙돌격장갑차•476

Chapter 4 함정•482
1. 수상함•482

Chapter 5 항공기•513

Chapter 6 유도무기•540

1. 지대지유도무기•540
2. 순항미사일•546
3. 스마트폭탄 KGGB•560
4. 어뢰•562

Chapter 7 방공무기•580

1. 대공포•580
2. 대공유도무기•589

Chapter 8 지휘통제 및 통신•601

1. 통신장비•601
2. 두뇌와 중추신경 C4I•613
3. 데이터링크 - 네트워크 중심 작전환경 구현•166

Chapter 9 무인체계•621

1. 로봇과 무인(無人)•622
2. 병사도 디지털 환경에 연동•628
3. 무인수상정 및 무인잠수정•631
4. 하늘의 로봇, 무인항공기•634
5. 경제성도 높이고 전투효과도 올린다•641

Chapter 10 감시정찰 및 전자전 무기체계•642

1. 전자전 체계 •643
2. 레이더 체계•646
3. 합성개구레이더(SAR) 체계•651
4. 전자광학/적외선(EO/IR) 센서•652
5. 수중감시체계•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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