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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산업의 역사(한국방위산업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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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12), 우리나라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방산백서 제1부(12), Chapter 2 '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




방산전문 매체 '글로벌디펜스뉴스'는 '한국방위산업학회(회장 채우석)'가 지난 2년간 집필한 '방위산업 40년, 끝없는 도전의 역사' (이하 '방산백서')를 전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하여 방위산업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래의 전문은 '방위산업 40년, 끝없는 도전의 역사' (이하 '방산백서')의 원문이며, 한국방위산업학회의 동의 하에 게재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자주국방을 위해 방산제품 개발에 참여한 민·관····연 관계자와 방산제품 시험 도중 부상 당하거나 순직하신 모든 분들께 격려와 위로의 박수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제1부 요약>


제1부에서는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태동부터 현재의 방위산업에 이르기까지 방위산업과 관련된 주요사건과 이슈 중심으로 정리했다. 우리나라 방위산업은 1960년대 말부터 있었던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과 주한미군 철수 등 한반도 안보환경의 불안정을 극복하고 자주국방을 실현하려는 의지와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창설하고 이어 한국의 최초 방위사업이라 할 수 있는 번개사업과 1차 율곡사업을 시작하여 짧은 기간에 미사일까지 개발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기반이 된 중화학공업은 곧 방위산업을 위해 육성되었고 방위산업과 함께 발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미사일 개발이 중단되고 국방과학연구소가 축소되는 등 시련의 과정이 있었으나, 2・3차 율곡사업을 통해 방위산업의 기반이 다져지고, 한국형 정밀무기 개발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었다. 율곡감사는 방위사업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고, 각 정부별로 이루어진 국방개혁과 획득제도 개선 및 방위력개선사업을 통해 방위산업은 내실을 다지면서 첨단화를 지향해왔다. 2006년 방위사업청의 설립으로 방위산업은 개방과 경쟁의 장(場)으로 진입하는 변혁을 겪게 되었고 국제경쟁력 강화를 모색하는 과정에 있다.






Chapter 2 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

12. 우리나라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우리나라 중화학공업과 경제발전에 대한 평가

일본의 법정대학비교경제연구소에서 발행한 『동아시아 공업화 다이너미즘(東アジア工業化 グイナミズム)』에서는 한국의 중화학공업 발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국의 중화학공업은 1970년대 후반에 급속한 발전을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철강, 조선, 석유화학, 자동차, 전자 등의 분야에서 국제경쟁력을 갖게 되었다. 한국은 NIES(신생공업국) 중에서도 중화학공업 기반을 가진 풀세트(full set)형 공업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중화학공업은 한국 경제발전의 성장동력이 되었다. 

이는 1973년부터 시작된 중화학공업건설계획으로부터 창출되었다. 그러나 이 중화학공업건설계획이 현재 한국 자본주의의 중화학공업 생산력을 구축한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것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더욱이 한국경제건설사에 관한 여러 중요한 논문에서 1970년대 중화학공업건설계획은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무시당하고 있다.






1970년대에 이룩한 중화학공업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경향은 중화학공업건설계획이 그 후 중복투자나 과잉투자 문제를 일으키고 그것으로 인해 경제위기를 가져와서 박정희 정권 붕괴와 1980년대 초의 한국경제와 정치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유신체제로 인해서 그 역사적 의의를 손상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와타나베 도시오(渡辺利夫)가 저술한 『한국경제발전론(韓國經濟發展論)』에 따르면,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은 중화학공업의 육성이 그 요인으로 분석되어 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6・25전쟁 이후) 한국의 GNP 대비 제조업 비율(공업화율)은 1953년 8.9%였던 것이 1962년 14.3%, 1972년 22.4%, 1982년에는 33.0%에 도달했고, 1970년 말에는 대략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제조업 비율도 1990년대 한국은 26.9%로 일본의 23.4%를 능가했다. 취업자 증가율은 한국이 확실하게 높아졌다. 

실제로 1954년~1990년에 일본 제조업 취업자 증가율은 2.0%였는데, 1964년~1990년에 한국은 8.2%였다. 더욱이 양국의 최고 성장기에 국한하여 본다면 취업자 증가율은 한국이 일본에 비해 3배 높다. 즉, 1954년~1970년 기간의 일본의 제조업 취업자의 연평균 증가율은 3.9%였는데, 1964년~1978년 기간의 한국의 제조업 취업자 연평균 증가율은 11.4% 이다.”

이러한 지표 변화를 볼 때 한국의 경제발전은 20세기 들어서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급격한 성장을 이룩한 일본에 비해서도 성장 속도가 높다. 이러한 급격한 성장 과정에는 선진국의 경제발전사가 강하게 압축되어 있다. 경제발전의 압축은 무엇보다도 중화학공업화의 과정에서 예민하게 나타나고 급격한 중화학공업화가 경제발전 자체의 압축을 가져오게 한 요인으로 분석된 것이다. 주요 선진국의 역사적 경험과 비교할 때 한국의 공업화는 선진국의 3~4배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화학공업화 선언 이후의 수출 증가 속도는 일본보다 2배 정도 빨랐다.


4대 핵심공장 건설사업

방위산업 기반 구축을 위한 방안 모색을 위해 1969년 9월경에 당시 김정렴 상공부장관은 ‘한국 기계공업 육성방안’이라는 제목의 용역연구 과제를 미국 바텔 연구소와 우리나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에 공동으로 위탁했다. 당시 우리나라 기계공업의 수준은 진주의 ‘대동공업’이 농기계를 생산하는 수준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정도였고, 그 외에는 산업기반이 없었다. 미국 바텔 연구소에서는 한국계 미국인 해리 최 박사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는 이경서 박사가 연구책임자로 약 6개월 동안 공동연구를 수행했다. 

이경서 박사는 미국 MIT에서 기계공학 석・박사학위를 받고 현지 연구기관에서 근무하다가 귀국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근무를 시작한 상태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측은 주로 우리나라 기계공업 현황과 실태조사 임무를 수행했고, 미국 바텔 연구소 측은 발전방안을 제시했다. 연구결과는 1970년 4월경에 당시 이낙선 상공부 장관에게 보고되었다(김정렴 씨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간 후였다).

연구결과의 주요 내용은 “첫째, 주도산업(lead industry) 분야를 선정하여 집중 육성함으로써 나머지 산업 분야의 발전을 이끌어가도록 해야 한다. 즉, 주도산업과 파생산업의 구조로 발전시킨다. 둘째, 주도산업은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산업으로는 ① 조선소 ② 중기계종합공장 ③ 주물선(鑄物銑)공장 ④ 특수강공장, 이 4대 분야가 바람직하다”는 것이 요지였다. 종합제철 및 중기계종합공장과 조선소를 주도산업으로 하고, 이에 필요한 소재를 공급하기 위해 주물선공장과 특수강공장을 건설한다는 개념이었다. 

이렇게 중공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곧 방위산업 건설의 기반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당시 조선산업이나 종합기계공업보다는 스위스의 정밀기계산업을 모델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연구팀의 결론은 우리나라처럼 기술기반이 없는 상태에서는 조선공업이나 종합기계공업처럼 덩치가 큰 산업이 노동력 확보와 수출에 모두 유리하고, 여러 가지 파생산업을 발전시키기가 용이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보고에 참석했던 당시 상공부 기획관리실장 오원철 차관보가 이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방위산업과의 직접적인 연계성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연구보고서는 없던 것으로 되어버렸다. 보고서는 그렇게 폐기될 운명이었는데, 약 3개월 후인 1970년 7월경에 한국 측 연구책임자였던 이경서 박사가 경제기획원 장관이던 김학렬 부총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상공부에 보고했던 연구보고서에 대해 설명을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경서 박사는 이낙선 상공부 장관과 경제기획원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학렬 부총리에게 보고했고, 보고받은 김 부총리는 상공부 장관의 동의를 구하고 이를 청와대에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이 보고서는 1주일 후인 1970년 7월에 청와대 경제과학심의회의를 마친 후에 특별보고 형식으로 박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당시 보고자였던 이경서 박사에 의하면 보고서 차트의 맨 마지막 장에 “중공업은 곧 방위산업”이라는 문구가 결론으로 제시되어 있었는데, 박 대통령이 이 부분에서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다. 중공업 육성이 곧 방위산업 육성이라는 개념을 인식한 것으로 보였다.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연구보고서를 승인하고는 경제부총리가 책임지고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김학렬 부총리는 황병태 경제협력차관보를 팀장으로 하고 경제기획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엘리트들로 구성된 특별전담팀(TF)을 꾸린다. 경제기획원은 기계공업 육성을 위해 주철주물공장, 특수강공장, 중기계공장, 조선소, 이 4대 공장의 건설을 전략적 우선사업으로 정하고 이를 ‘4대 핵공장’[즉, 4대 핵심적인(core) 공장] 건설계획으로 추진했다. 이 4대 핵공장 건설은 곧 방위산업 건설이었다. 탄피와 총알을 만드는 구리공장 건설도 비밀리에 함께 추진했다. 

하지만 중소기업 수준의 주물공장이나 주방용기를 만드는 구리공장 정도를 가지고는 하루아침에 무기 생산은 불가능했다. 기술, 기술자, 경험, 기본설비조차 없었다. 한국이 갖고 있던 것은 의욕뿐이었다. 무엇보다 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이 4대 핵공장 건설은 외국의 차관을 얻어 기술제휴와 함께 전문적인 방위산업체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는데, 이는 일본이나 미국 등 선진국의 협력이 있어야 가능했다. 1970년 9월 한일 정기 각료회의에 4대 핵공장 건설과 차관계획을 주요 의제로 상정했으나 일본이 협조에 난색을 표했고, 미국이나 유럽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 모델도 분명치 않은 막대한 투자에 돈을 대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중화학공업을 통한 방위산업

경제기획원이 애쓰는 동안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우리나라에서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의지가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71년이었다. 1971년 7월 1일 제7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경공업의 한계성과 안보환경의 악화로 인해 산업구조를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민주발전의 자양요소이며 민주사회의 성장은 통일기지의 확보인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 중화학공업시대의 막을 올리고 한강변의 기적을 4대강에 재현시킬 것이며, 수출입국의 물결을 5대양에 일으키며 농어촌을 근대화하여 우리나라를 곧 중진국의 상위국에 올려놓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경제계는 물론 경제기획원조차도 중화학공업의 육성에 회의적이었다. 기술 노동력을 비롯한 중화학공업의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다. 1971년 11월 9일 경제기획원에서 방위산업건설(4대 핵공장 건설)의 추진현황에 대한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진척이 지지부진한 데 대해 크게 실망했다. 경제기획원이 “4대 핵공장 건설계획에 일본 측이 난색을 표하고 있어 협조가 어렵고, 미국 및 유럽으로 차관선을 바꾸어 교섭했으나 진전이 없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배석한 오원철 광공전(鑛工電)차관보는 나름대로의 방위산업 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발언할 위치는 아니었다. 회의가 끝난 후 오 차관보는 전에 상공부 장관으로 모시던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방위산업에 대해 나름대로 아이디어가 있음을 전화로 알렸다. 이에 김 실장이 즉시 오 차관보를 불러 그의 방위산업 구상을 전해 들었다. 오 차관보는 4대 핵공장 건설을 방위산업과 직접적으로 연계시키기 어렵다는 인식 하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첫째, 무기생산 전문 공장의 건설은 나중에 수요가 없을 때는 비경제적이고 인력 확보도 어렵다. 둘째, 처음부터 완제품 무기 공장을 세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모든 무기도 결국 분해하면 부품’이라는 점에 착안해 일단 부품 공장들을 세우고 각 공장에서 생산한 부품을 결합하여 완제품을 만드는 방식이 향후 무기수요 변동에 따른 비경제성을 최소화할 수 있다. 셋째, 무기생산은 중화학공업 육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방위산업은 무기를 개발・생산하는 산업이므로 경공업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방위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 육성이 가장 효율적이며 불가피하고도 유일한 대안이라는 등의 요지였다. 

방위산업의 건설 방식은 19세기 말의 일본처럼 정부에서 조병창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기업으로 하여금 방위산업을 영위하도록 하고 이를 위해 중화학공업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는 개념이었다. 처음부터 방산 전문기업을 만드는 것보다는 민수 겸용이 가능한 중화학공업으로 접근한다는 방안이었다. 우리나라가 병기창 위주의 정부 소유 전문 방산업체를 육성하지 않고 민간기업을 참여시켜 개발하게 한 것은 미국과 선진국이 도와주지는 않고 견제만 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올바른 방향이었다.

오원철 차관보는 병기생산만을 전문으로 하는 군공창은 경제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단 군의 소요를 충족하는 병기를 모두 제조하고 나면 공장을 유지할 제품이 없어 정부 보조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므로 낭비가 심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훗날 대한중기는 야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포신 제작에는 성공했으나, 국방부의 조달품이 모두 완납되자 방대한 현대식 설비를 가동하지 못하고 놀리게 되었다. 대한중기는 양산 기계제품을 생산하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파산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대우중공업은 부실기업인 디젤엔진업체 한국기계(주)를 인수하고는 엔진보다는 지게차 생산에 집중하여 현금흐름을 개선했다. 대우중공업으로 개편된 디젤엔진공장은 결국 정상가동이 되지 않았으나, 양산품인 지게차 생산으로 회사의 운영을 지탱하면서 방산제품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현대 무기체계는 선진국 수준의 중화학공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선진국들은 다투어 중공업과 화학공업을 발전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여왔다. 미국도 2차 대전에 참전하고 전쟁이 장기화되자 테네시 계곡 개발에서 얻은 막대한 전력으로 대규모 화약공장을 건설했는데, 종전이 되자 이를 비료공장으로 전환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화약의 원료인 질산은 요소비료의 원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우수한 기술자를 확보하는 문제였다. 모든 병기는 정밀부품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정밀가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기술자들을 데리고는 병기를 생산할수 없었다. 기능공들은 미크론 단위(㎛: 1,000분의 1mm 단위)의 가공을 하고 또 측정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1968년 당시 대부분의 기계공장에서는 가장 정밀한 측정기의 단위가 100분의 1mm였으며, 대부분의 측정은 캘리퍼스(calipers)로 실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크론 단위의 정밀도로 가공하는 기술자는 따로 양성해야 했다.

김정렴 비서실장과 함께 오원철 차관보의 방위산업건설과 중화학공업화정책 방향 설명을 듣고 박정희 대통령은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방위산업이나 중화학공업의 기술 및 시설기반은 사실상 같다. 그러므로 중화학공장을 건설하면 무기생산에 필요한 부품을 생산하여 공급할 수 있고, 필요시에는 완제품을 생산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무기생산 수요가 없을 경우에는 민수공장으로 전환하여 경제성을 확보할 수도 있다.

무기생산 전용의 군수공장을 설립하는 방안보다는 평시에 민수와 군수 분야에 겸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것이 방위산업의 목적을 달성하면서 동시에 경제건설도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이었다. 박 대통령은 “돈도 적게 들면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동시에 건설하여 유사시에는 민수부문을 전환하여 활용할 수 있는 일석이조 전략”이라고 찬성했다. 그날로 박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청와대에 경제제2비서실을 만들게 하고, 다음날인 1971년 11월 10일에 오원철 차관보를 경제제2수석비서관에 임명하고 방위산업 및 중화학공업을 관장하게 했다.

방위산업을 중화학공업과 연계하여 대규모로 육성하려고 한 또 다른 배경에는 방위산업 육성을 통해 미국이 쉽게 우리나라를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전략적인 의도가 숨어 있었다. 창원 같은 대규모 기계공업단지가 안보의 안전판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당시 김정렴 비서실장은 미국의 고위관계자들로부터 “월남은 농업국가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있지만, 일본은 공업국가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박 대통령이 이를 전해 듣고는 “우리도 방위산업을 기간으로 하는 공업구조를 가지면 미군이 쉽게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방위산업에 박차를 가했고, 창원공업단지를 방위산업을 위한 기계공업단지로 건설한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을 지킬 만한 어떤 가치나 이익이 있느냐, 소련으로 넘어갈 때 어떤 손실이 있느냐 하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대규모 방위산업 능력을 보유하게 될 경우에는 미국과 같이 일할 수 있는 상대가 될 뿐 아니라, 소련에게 방위산업 기반이 넘어가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미국이 우리나라를 쉽게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고위관계자들로부터 이런 암묵적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창원공업단지의 틀이 완성되고 나서 미국 멜빈 프라이스(Melvin Price) 하원 군사위원장 등 정・관계 고위인사들이 줄줄이 방문했을 때, 그들은 대규모 병기공장을 보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결국에는 이것이 주한미군 철수를 중단케 하는 데 기여했다고 한다.


중화학공업국을 향한 마지막 기차: 중화학공업화 선언

이렇듯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는 1971년 11월 9일에서 11일 사이에 박정희 대통령이 ‘번개사업’을 지시하고, 청와대에 경제제2수석비서관실을 신설하여 경제제2수석비서관으로 하여금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을 관장하게 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1972년 2월에 1차 방위산업육성회의가 대통령 주재로 개최되었다. 

이러한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육성에 대한 정책 방향에 대해 당시 국회에서는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일부에서도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중화학공업을 하려면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는데 무슨 돈이 있느냐, 실효성과 성공할 가능성이 있느냐, 미국이 싫어하는데 왜 굳이 하려고 하느냐는 등의 이유였다. 1972년 5월 30일 오후 중앙청에서 무역진흥확대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수석을 집무실로 불렀다. 

“임자! 100억 달러 수출하려면 무슨 공업을 육성해야 하지?” 박 대통령의 표정은 진지했다. 박 대통령은 불필요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항상 정확한 질문을 했고, 참모들은 정확한 답을 제시해야 했다. 오원철 수석은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산업구조 고도화에 대한 전략’을 밝힐 때가 되었다고 결심했다.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다고 봅니다.”

이날의 짧은 대화는 역사가 되었다. 한국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이어서 1972년 6월 초 박 대통령은 ‘중화학공업기획단’을 구성하여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이 지시가 ‘방위산업의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추진과 중화학공업을 실질적으로 발진시키는 명령’이었다.

막대한 국가 재원이 소요되는 중화학공업 건설은 국회의 협조 없이는 곤란했다. 중화학공업을 원만하게 추진하려면 국회를 확실하게 장악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10월 유신)’을 발표한 동기의 하나였다고 한다. 10월 유신을 통해 국회는 대통령이 직접 지명하는 ‘유정회’ 국회의원이 의석의 3분의 1을 점하게 되었다.

1972년 10월 박 대통령 주재로 개최된 방위산업육성진흥회의에서는 ‘방위산업육성’에 대한 안건과 ‘중화학공업 육성’에 대한 안건이 동시에 다루어졌다. 기본병기를 중심으로 한 무기의 시험제작인 번개사업을 통해 방위산업에 대한 어느 정도 가능성과 자신감을 확보했고, 방위산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방위산업 연계 중화학공업의 육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아 갔다.

또한 1972년 11월 경제기획원의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연평균 25%의 수출 증가를 계속하면 1980년에는 적어도 100억 달러 수출은 무난히 달성할 수 있고, 1981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을 1,000달러 수준으로 증가시킬 수 있다”라고 우리 경제의 장기전망을 제시했다. 중화학공업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수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임을 인식했던 것이다.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발전을 바탕으로 중화학공업 선언이 나오게 된다. 박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저는 새해를 맞이하여 경제정책에 관한 새로운 선언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중화학공업화 시대에 진입했습니다.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전력을 경주할 것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모든 국민이 ‘과학화 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합니다. 과학기술의 발전 없이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기대할 수 없으며 모든 경제목표의 달성은 전 국민이 전 국민적 과학기술에 참여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에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해야 하며, 이때 전 수출상품의 50%가 중화학공업 제품이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철강, 비철금속, 석유, 기계, 조선 및 전자공업 육성에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중략) 이러한 생산시설을 위해서 동・남・서해안에 국제 규모의 대단위 공업단지를 조성할 방침입니다…….”

이 중화학공업화정책 선언은 한국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돌아서는 전환점이 되었고,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산업과 경제가 성장하며 방위산업의 기반이 닦이는 출발점이 되었다.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 진입을 위한 마지막 기차’를 타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며, 대한민국이 오천년 역사상 세계 경제 질서를 향해 ‘승부수’를 던지는 가장 극적인 상황이었다. 중화학공업화 선언은 대통령 특명사항으로 김정렴 비서실장, 오원철 경제제2수석을 중심으로 철저한 보안 속에서 이뤄졌다. 당시 남덕우 재무부 장관도 이를 뒤늦게야 알고는 “중화학공업화를 위한 막대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느냐가 문제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일본의 지도자들은 나라와 민족의 명운을 걸고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하다가 패망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지금은 세계경제강국으로 부상했는데 그 배후에는 중화학공업 건설이 있었다. 나는 지금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거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경제의 명운을 걸고 건설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해봅시다”라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각료들은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했고, 회의(懷疑) 또한 컸다. 후에 남덕우 재무부 장관은 그의 회고록에서 1970년대 우리나라 시대 상황에서 중화학공업이 대안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두 가지로 요약했다. 하나는 당시 절박한 안보상황에서 자주국방을 위한 무기를 생산하려면 중화학공업 없이는 불가능했으며, 다른 하나는 경공업으로는 수출에 한계가 있으므로 일본처럼 중화학공업으로 이행하는 것이 경제발전 단계의 당연한 순서라고 회고했다. 

1973년 1월 31일 청와대 지하 방공호에서 중화학공업기획단의 오원철 수석은 박정희 대통령, 김종필 국무총리, 태완선 부총리, 남덕우 재무부 장관, 국방과학연구소장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중화학공업 계획 및 방위산업과의 관계 등이 포함된 ‘중화학공업화정책 선언에 따른 공업구조 개편론’에 대해 최종 브리핑을 했다. 방위산업 관련 57개, 중화학공업화 관련 80개의 브리핑 차트를 가지고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설명하는 데 4시간이나 걸렸다.56 브리핑이 끝난후 박 대통령은 오원철 수석에게 중화학공업화 계획에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물었다.

오 수석은 “내외 자본을 합쳐서 약 100억 달러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박 대통령이 남덕우 재무부 장관에게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남덕우 재무부 장관이 큰 금액에 우려를 표하면서 머뭇거리자, 박 대통령은 부동자세로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 엄숙하고 조용한 말투로 짧게 네 문장의 말을 했다.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질문인 동시에 대답이었다.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국민들이 기꺼이 따라줬다.” 그러고는 말을 끊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때 패전을 해서 국민에게 막중한 피해를 주었지만.” 다시 말을 끊고는 한참 후에 조용히 말했다.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 해줘서야 되나.”

이는 방위산업 육성과 중화학공업 건설에 대한 그의 결론이고 최종 정리였다. 곧이어 1973년 2월 12일, 박 대통령은 ‘전 산업의 수출화’라는 휘호를 직접 써서 중화학공업기획단에 하사했다. 중화학공업 건설의 목적은 수출에 있다는 명령이었다





중화학공업육성계획

박 대통령의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구현하기 위해 정부는 국가의 조직과 인적 자원을 중화학공업 건설 추진에 동원할 수 있도록 개편하고, 제도도 개혁했다. 1973년 5월 14일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설치령(대통령령 제6675호)을 제정・공포하여 정부조직법에 의한 중앙행정기관인 위원회로서 국무총리 소속 하에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회장 국무총리)를 설치했다. 중화학공업육성정책의 추진 모체를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로 정한 것이다. 그때까지는 경제기획원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립과 그 시행을 주관하고, 국가의 전반적인 경제운용을 통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경제개발을 주도하던 장기영, 김학렬 등과 같은 인물들이 물러난 후 1970년대에 들어서서는 경제기획원보다는 청와대와 박 대통령 자신이 직접 주도하는 형국이 되었다. 1973년 5월 24일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는 1974년부터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완료되는 1981년까지 8개년 동안 6개 업종 분야에 대한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했다. 1981년까지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목표로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석유화학의 6대 분야를 중점투자 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각 분야별로 산업기지(대단위 공업단지)를 건설하도록 하는 중화학공업 중심의산업구조개편 계획을 확정했다. 

중화학공업육성계획은 기본적으로 1981년까지 연간 수출 목표 액수와 1인당 국민소득 목표 액수를 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한 ‘수출 목표지향적’인 계획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려면 전체 수출상품의 50% 이상이 중화학공업 제품으로 구성되도록 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 정부는 철강, 자동차, 시멘트, 조선, 기계, 정유 및 석유화학 등 각 분야별 중화학공업 육성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 

중화학공업육성계획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차이를 살펴보자. 중화학공업육성 계획의 각 분야 계획은 1972년~1976년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1977년~1981년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포함된 내용들이 많았다. 2차 및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도 화학・철강・기계공업과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이 담겨 있었다.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년~1971년)에는 중화학공업 육성이라는 공식 표현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중화학공업 기반 구축을 위한 제반 시책들이 담겨 있었다.

1967년 3월 섬유공업 시설에 관한 임시조치법, 1967년 4월 기계공업진흥법 제정 및 과학기술처 설립, 조선공업진흥법(1969년 5월), 전자공업 진흥법(1969년 1월), PVC공업육성책(1969년 5월), 석유화학공업육성법 및 철강공업육성법(1970년 1월), 중공업건설계획확정(1970년 11월) 및 전자공업 육성방안(1970년 11월) 등이 중화학공업 관련 사항 들이다. 그러나 그 규모와 내용이 중화학공업 중점 육성이라기보다는 산업구조 고도화의 일부로 비교적 완만하게 추진되는 계획이었다고 보면 된다.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년~1976년)은 산업별 수요예측이나 생산목표와 투자계획을 제시하지 않고 전략산업을 지정하지도 않았으며, 단순히 산업의 안정과 균형발전에 역점을 두고 있는 데 반해, 1973년 8월 경제기획원이 중화학공업화정책을 반영하여 발표한 ‘우리 경제의 장기전망(1972년~1981년)’에는 앞서 언급한 철강, 비철금속, 조선, 기계, 화학, 전자, 이 6개 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품목별 물동계획량을 목표지향적으로 계획한 것이 큰 차이점이다.

즉, ‘중화학공업육성계획’은 3차 및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중화학공업 부문을 따로 떼어낸 다음 내용을 더욱 구체화하고 분야별로 목표량을 크게 높여 제시한 것으로서 원래 계획되었던 3차 및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중화학공업 사업 내용과 규모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3차 및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대폭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3차 5개년 계획이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3차 5개년 계획의 출범이 곧공식적인 ‘중화학공업 시대의 선언’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1980년대 초까지 수출 100억 달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제철 생산능력을 100만 톤에서1,000만 톤으로, 조선은 연간 25만 톤에서 500만 톤으로, 정유시설은 39만 배럴에서 94만 배럴까지, 석유화학(에틸렌)은 10만 톤에서 80만 톤까지, 전력은 394만kW에서 1,000만kW까지, 시멘트는 800만 톤에서 1,600만 톤으로, 자동차는 연간 3만 대에서 50만 대로 생산목표를 설정했다. 

이에 따라 종합제철기지, 창원기계공업단지, 여수종합화학단지, 울산석유화학단지, 온산비철금속공업단지, 옥포조선공업기지 등 공업단지들이 모두 정부에 의해 조성되고 기반시설이 마련되고 기업이 유치되었다. 특히 창원기계공업단지의 경우는 아예 방위산업 건설 추진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방위산업체로 지정되면 평상시 작업량의 80%는 민수용, 나머지 20%는 방산용이라는 비율을 원칙으로 삼았다. 조선소도 물론 전쟁 때 쓰일 것을 전제로 독(dock)을 건설했다. 이와 같은 계획의 변경에 따라 중화학공업 추진 실태도 1973년 1월 선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이전에는 울산공업단지 건설을 비롯해 비료공장, 포항제철소 건설 같은 사업들을 포함하여 기존의 경공업 중심에서 중공업으로 점차적인 산업구조 개편을 지향하는 정도로 추진되었다. 1961년에 충주비료공장이 건설되었고, 이후 1964년 4월에 쌍용시멘트와 한일시멘트가, 1966년에 충북시멘트가, 1967년 3월에 영남화학과 진해화학이 건설되었다. 

이와 더불어 1963년에 한국나일론(현 코오롱)이 건설되었고, 1964년 동양나일론이 건설되었다. 1964년에 컴플렉스의 가장 기초가 되는 우리나라 최초 정유회사인 대한석유공사(유공)가 설립되었고, 1969년에는 호남정유회사가 설립되었다. 이를 보면 1960년대에는 주로 섬유 및 석유화학공업 중심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 철강공업은 1970년 4월 1일에 착공한 포항종합제철이 철강 일관작업 형태로 건설되어 1973년 7월 3일에 준공되면서 기반을 구축했다.

그런데 1973년을 기점으로 중화학공업은 단순한 경제정책 차원이 아니라 방위산업 육성과 연계되고 규모도 달라졌다. 창원기계공업단지는 처음부터 방위산업을 목적으로 조성되었고, 구미전자산업단지의 확장도 정밀전자무기체계 개발과 연계하여 이루어졌다. 

조선공업 부문에서는 현대중공업이 1970년 9월 사업 신청을 할 당시 연간 10만 톤급의 조선소로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1972년 3월 착공 당시에는 50만 톤급으로 확대되었고,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방침과 세계 조선업 발전 전망에 따라1974년 6월 준공 당시에는 450톤의 골리앗 크레인 2기가 설치된 초대형 조선소가 되었다. 이후 1974년에는 삼성중공업이 착공되어 1979년에 완공되었고, 이어서 대우조선이 1981년에 완공되었다. 이후 우리나라 해군 함정은 100%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경우 당초 1973년 7월 준공 시에는 조강기준 연산 103.2만 톤 규모로 건설되었으나, 창원산업단지와 조선공업을 뒷받침하고 수출 증대를 위한 중화학공업화정책에 따라1976년 5월 제2기 설비확장공사를 통해 조강기준 연산 260만 톤 규모로 확대되었으며, 1978년 12월에는 조강기준 연산 550만 톤 규모의 제3기 설비확장공사를 준공했다. 

1981년 2월에는 조강기준 연산 850만 톤 규모의 제4기 설비확장공사를 준공했는데, 제3기 준공 당시 철강수요의 지속적인 증가추세 전망으로 제2제철공장의 건설계획이 수립・추진되었다. 이후 광양만에까지 설비를 지속 확장했다.






중화학공업 육성의 성과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이 발표된 지 불과 5개월도 안 된 1973년 10월에 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중화학공업 육성에는 석유자원의 공급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타격이 컸다. 1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도매물가지수(1985년 기준)가 1973년 19.3%에서 1974년 27.4%로, 1975년에는 다시 34.6%로 치솟았다. 실업률은 4%를 웃돌았고 14%까지 치솟았던 경제성장률은 8.5%대로 곤두박질쳤다. 경제가 위기에 봉착했다.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에도 석유파동에 대비한 계획은 없었다.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와 경제기획원은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의 전면 수정을 청와대에 요청했다. 경제적인 상황과 관점에서는 당연한 요청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화와 방위산업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다. 1974년 1월 18일 박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밝혔다.“……에너지가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에너지 소비가 비교적 적은 부문을 우선적으로 추진해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전자공업이라든지, 조선이라든지…… 그 밖에 다른 사업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조정이 있겠습니다만 전반적인 기본계획은 수정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중화학공업이 경제발전구조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과 안보적 배경을 바탕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위기상황에도 불구하고 큰 수정 없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1970년대 정부의 지속적인 중화학공업육성정책으로 중화학공업 제품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 12.8%에서 1980년에는 41.5%까지 늘어났다. 제조업 부가가치의 50%를 중화학공업으로 창출한다는 목표는 1979년 52.1%로 달성되었다. 

당초 정부는 중화학공업 투자로 1981년까지 1인당 GNP 1,000달러와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는데 이를 조기에 달성했다.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이 엄두도 못 낸다는 중화학공업화에 성공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노동집약적 산업구조가 기술집약적 구조로 바뀌어갔다. 철강, 비철금속, 화학 등의 공업에 필요한 원재료를 국산화하여 공업의 자립을 이룩하면서 고도 산업국가로 도약할수 있는 발판도 마련했다.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발전은 1962년 착수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부터 시작하여 수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궤를 같이한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62년~1966년)에서는 전력, 석탄 등 에너지자원과 기간산업 및 사회간접자본의 확충과 농업생산력을 확대했고, 공업정책은 ‘선진국에서 사양화되어가던’ 섬유산업 등 경공업을 유치하여 수출산업으로 육성했는데, 이것이 우리 경제발전의 디딤돌이 되었다.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년~1971년)은 식량자급화와 산림녹화, 화학・철강・기계공업의 건설에 의한 산업의 고도화와 7억 달러 수출 달성이 목표였다. 

수출공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공장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주로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였지만, ‘원료의 국산화’를 위해 기초원료공업과 제철공업 건설이 시작되었다.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년~1976년)62은 ‘성장・안정・균형의 조화를 기조로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중화학공업의 건설’을 이룩하는 것이었는데,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 후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대폭 증대되었고, 방위산업을 위한 목표지향적인 산업 육성계획이 수립되었으며,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분야로 주력 산업이 옮겨갔다. 

기술자와 과학자도 양성되었고, ‘기계의 국산화’가 이루어졌다.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제철소와 석유화학공장이 증설되었고, 조선소, 자동차공장, 공작기계공장, 전자공업공장 등이 건설되었다.수출액이 크게 늘어 1977년 12월에 100억 달러 수출을 이룩했다. 일본이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기 2년 전인 1955년에 수출이 20억 달러였는데 10년 후인 1967년에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우리나라는 1973년 1월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기 2년 전인 1970년에 수출액이 10억 달러였는데 10년 후인 1977년 12월 22일 오후 4시에 100억 1,600만 달러의 수출을 달성했다.

1977년 이후에는 중화학공업의 기반에 정밀공업과 두뇌공업이 더해졌다. 산업구조 개편을 끝내고 내실을 다지면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에너지와 자원을 절약하는 정책이 세워졌다. 1995년 10월 우리나라 수출은 1,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우리나라의 산업발전의 핵심은 ‘수출제일주의’와 ‘공업입국’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공업기반이 없는 한국에서 수출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구조(피라미드)를 정부 주도하에 새로 구축했다”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초기의 동인(動因)은 방위산업 건설을 위한 중화학공업 육성에 있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은 1980년대 초반에 과잉투자의 폐해를 부르기도 했다.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우리나라 전체 투자액 21조 5,650억 원의 19.3%에 달하는 4조 1,357억 원이 중화학공업에 투자되었고, 심지어는 공장건설의 90%를 정책금융에 의존한 사례도 있었다. 재벌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중화학공업에 투자했고, 재벌기업의 발달과 경제력집중현상이 생겨났다. 중공업 분야에서는 생산이 너무 많아진 반면, 경공업에서는 생산부족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9년 2차 석유파동으로 세계경제가 수요 감소에 직면하게 되자 과잉설비에 대한 구조조정을 해야 했다.

이렇듯 국내 공업기반이 취약하고 기술 수준이 낮은 상태에서 추진된 중화학공업 육성책은 긍정적인 면 못지않게 일부 부작용도 초래했고 한동안 한국 경제의 구조적특징으로 고착화된 측면도 있다. 대일본 수입의존도의 심화와 대일 무역수지 적자의 만성화, 기술 및 자본의 대외의존도 심화, 대외부채의 증가, 차관으로 인한 외자기업의 부실화 등의 현상이 이미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잉태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의 특징

북한은 우리보다 훨씬 일찍 1950년대부터 중화학공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1952년 4월 27일 북한에서 열린 과학자대회에서 김일성은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의 원리에 기반을 둔 주체사상을 내놓으며 이를 구현하기 위한 핵심 과제로 ‘전력 및 지하자원 개발, 기계공업과 철강공업 육성, 식량문제 해결, 의류문제 해결, 과학원 창설’을 내놓았다. 1970년대까지는 북한이 중화학공업 부문에서 크게 앞섰으나, 결국은모두 실패했다.

한국은 처음부터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지 않았다. 와이셔츠와 같은 최종제품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직물과 같은 중간원료 공장을 세워 수출했고, 이후 폴리에스테르와 같은 합성섬유를 개발했다. 이 피라미드의 마지막 단계가 석유화학공장 및 종합제철 건설이다. 남북 경제정책의 가장 큰 차이는 이 같은 ‘피라미드형 개발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섬유제품을 예로 들면, 피라미드의 최하부는 의류이다. 그리고 그 위로 직물, 합성섬유, 석유화학이 자리 잡고 있다. 아래에서부터 최종제품 → 중간제품 → 중간원료 → 기초원료 순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높은 수준의 기술력이 필요하다. 

이 구도는 곧 한국의 수출전략 순서가 되었다. 1차 및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어느 정도 이룩한 경공업 분야의 발전이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뒷받침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한국은 수출지향적인 중화학공업이라는 점에서 경제개발 모델이 다른 나라와 조금 달랐다. 물론 당시 대부분 선진국은 공업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중화학공업화가 이뤄졌고, 수출도 늘어났다.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육성의 연계라는 측면에서는 선진국도 유사한 형태로 발전했다고 본다. 

독일의 경우 방위산업과 일반 중화학공업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고 방위산업이 곧 중화학공업이고 중화학공업이 곧 방위산업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은 밀접하다.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일본도 방위산업이 중화학공업을 선도하거나 중화학공업과 연계되어 발전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경우는 중화학공업 중점 육성의 잠재된 목적과 초기의 성장동력이 방위산업에 있었다는 점이 보다 뚜렷했다. 박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구상은 방위산업 건설을 위한 고민으로부터 출발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모델로서 중화학공업 발전은 방위산업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추진 방법에 있어서는 먼저 수출 목표를 수립해놓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중화학공업 발전 모델은 보다 깊이 방위산업과 연계되어 있고 좀 더 목표지향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전편 - 초기 방위산업 시설 및 공업단지 >
< 다음편 - 율곡사업(‘국방 8개년 계획’)과 기본병기 국산화 >



                                           < 연 재 순 서 >


PART 1 방위산업의 역사 / 서우덕 •16

Chapter 1 방위산업이 태동되기까지 •19

1. 1・21사태(김신조사건)•19
2. 미국 푸에블로호 납치사건•21
3.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23
4. 미군 정찰기 격추사건•24
5. 닉슨 독트린과 주한미군 철수•26
6. 자주국방과 방위산업: 불가피한 선택•29


Chapter 2 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31

1. 방위산업을 향한 첫발•31
2. 국방과학연구소(ADD)의 창설•35
3. 최초의 방위사업: 번개사업•47
4. 초기 방위산업 시설 및 공업단지•51
5. 방위산업 육성의 밑그림과 제도 구축•55
6. 우리나라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64
7. 율곡사업(‘국방 8개년 계획’)과 기본병기 국산화•81
8. 방산기술의 발전•90
9. 방산기술인력 양성•102
10. 한국방위산업진흥회의 설립•111


Chapter 3 방위산업의 시련과 도전•119

1. 핵개발•119
2. 미사일 개발•127
3. 전두환 정권과 국방과학연구소의 구조조정•141
4. 획득환경과 제도의 변화•144
5. 2차 율곡사업과 한국형 무기체계 개발•146


Chapter 4 방위산업의 안정과 성장•149

1. 3차 율곡사업과 첨단전력 확보•149
2. ‘818 군구조 개편’과 전력・획득조직 개편•151
3. 한국방위산업학회의 설립•153
4. 율곡사업 감사•158
5. 국외도입사업과 무기중개상•164
6.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의 방위력개선사업제도 개선•168


Chapter 5 방위산업의 경쟁과 도약•178

1. 국방획득제도개선과 방위사업청 신설•178
2. ‘국방개혁 2020’과 전력증강 방향•184
3. ‘국방개혁 307계획’•189
4. 방위산업 신경제성장 동력화•192
5. 업체 주관 개발의 활성화와 글로벌 도약의 시작•915
6. 방위사업의 투명성•198
7. 방위산업은 그래도 꿋꿋하다•201



PART 2 방위산업의 발전과 성과 / 서우덕.장삼열 •202

Chapter 1 방위산업 정책 및 제도의 변천•205

1. 방위산업 발전의 시대 구분•205
2. 역대 정부의 방산 육성정책•209
3. 국방획득조직의 변천•225
4. 국방획득 의사결정 기구의 변천•245
5. 방위사업수행체제의 발전•251
6. 방위산업 보호·육성정책•261
7. 방위산업의 개방 및 경쟁체제화•274


Chapter 2 분야별 방위산업 형성과 발전•283

1. 탄약 업체•283
2. 기동・화력장비 업체•288
3. 함정건조 역사와 함정 업체•296
4. 항공기 생산・정비 업체•308
5. 유도무기・로켓 업체•321
6. 통신장비 업체•327
7. 지휘통제(C4I)체계/전투체계 업체•333
8. 감시정찰 분야 업체•338
9. 화생방 분야 업체•344


Chapter 3 방위산업의 성과•346

1. 국산 명품 무기체계•346
2.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현황 및 위상•349
3. 방산수출•356
4. 방위산업의 기술파급 및 산업파급효과•360


Chapter 4 우리 방위산업의 특징과 발전 방향•372

1. 우리 방위산업의 특징•372
2. 방위산업 발전 방향과 전망•377



PART 3 국산 무기체계의 개발 / 신인호 •380

Chapter 1 소화기•383

1. 개인화기•383
2. K3 / K12 / K6 기관총•388
3. 유탄발사기와 소총의 복합화•393
4. 복합형 소총 - 세계 최초 개발•936
5. 특수목적 소총과 권총•399

Chapter 2 화력무기•402

1. 견인포•402
2. 자주포•408
3. 탄약운반장갑차•420
4. 박격포•423
5. 다연장로켓•428

Chapter 3 기동무기•432

1. 전차•432
2. 장갑차•450
3. 차륜형 장갑차•473
4. 상륙돌격장갑차•476

Chapter 4 함정•482
1. 수상함•482

Chapter 5 항공기•513

Chapter 6 유도무기•540

1. 지대지유도무기•540
2. 순항미사일•546
3. 스마트폭탄 KGGB•560
4. 어뢰•562

Chapter 7 방공무기•580

1. 대공포•580
2. 대공유도무기•589

Chapter 8 지휘통제 및 통신•601

1. 통신장비•601
2. 두뇌와 중추신경 C4I•613
3. 데이터링크 - 네트워크 중심 작전환경 구현•166

Chapter 9 무인체계•621

1. 로봇과 무인(無人)•622
2. 병사도 디지털 환경에 연동•628
3. 무인수상정 및 무인잠수정•631
4. 하늘의 로봇, 무인항공기•634
5. 경제성도 높이고 전투효과도 올린다•641

Chapter 10 감시정찰 및 전자전 무기체계•642

1. 전자전 체계 •643
2. 레이더 체계•646
3. 합성개구레이더(SAR) 체계•651
4. 전자광학/적외선(EO/IR) 센서•652
5. 수중감시체계•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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