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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산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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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산업의 시련과 도전(17), 핵개발

방산백서 제1부(17), 핵개발




방산전문 매체 '글로벌디펜스뉴스'는 '한국방위산업학회(회장 채우석)'가 지난 2년간 집필한 '방위산업 40년, 끝없는 도전의 역사' (이하 '방산백서')를 전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하여 방위산업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래의 전문은 '방위산업 40년, 끝없는 도전의 역사' (이하 '방산백서')의 원문이며, 한국방위산업학회의 동의 하에 게재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자주국방을 위해 방산제품 개발에 참여한 민·관····연 관계자와 방산제품 시험 도중 부상 당하거나 순직하신 모든 분들께 격려와 위로의 박수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제1부 요약>


제1부에서는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태동부터 현재의 방위산업에 이르기까지 방위산업과 관련된 주요사건과 이슈 중심으로 정리했다. 우리나라 방위산업은 1960년대 말부터 있었던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과 주한미군 철수 등 한반도 안보환경의 불안정을 극복하고 자주국방을 실현하려는 의지와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창설하고 이어 한국의 최초 방위사업이라 할 수 있는 번개사업과 1차 율곡사업을 시작하여 짧은 기간에 미사일까지 개발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기반이 된 중화학공업은 곧 방위산업을 위해 육성되었고 방위산업과 함께 발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미사일 개발이 중단되고 국방과학연구소가 축소되는 등 시련의 과정이 있었으나, 2・3차 율곡사업을 통해 방위산업의 기반이 다져지고, 한국형 정밀무기 개발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었다. 율곡감사는 방위사업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고, 각 정부별로 이루어진 국방개혁과 획득제도 개선 및 방위력개선사업을 통해 방위산업은 내실을 다지면서 첨단화를 지향해왔다. 2006년 방위사업청의 설립으로 방위산업은 개방과 경쟁의 장(場)으로 진입하는 변혁을 겪게 되었고 국제경쟁력 강화를 모색하는 과정에 있다.






Chapter 3 방위산업의 시련과 도전

1. 핵개발

원자력에너지 개발이 지금은 방위산업과는 관련이 없지만 초창기에는 미사일 개발과 함께 군사적 목적으로 추진되었을 가능성이 있어서 참고로 포함시켰다.


상업용 원자력에너지와 핵무기 개발계획

우리나라에서 핵(원자력)개발의 역사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최초의 국비 유학생을 원자력 분야에서 보내도록 했고, 정부 조직에 원자력 담당부서(원자력과)와 서울공대에 원자력공학과를 창설했으며, 원자력원(후에 원자력연구소)을 설립하여 원장으로 부총리급을 임명하고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인 TRIGA Mark-II 도입과 1958년 원자력법 제정 등 원자력산업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수준의 원자력강국이 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원자력에 대한 관심과 기반 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 2월 2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은 잠수함도 스스로 만드는데, 미국의 대한(對韓)원조가 언제까지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니 우리도 자립해야 한다. 그러니 원자력을 개발하고 군비(軍備)에 관한 위원회라도 만들어서 이순신 장군의 대(代)를 이을 기술자를 길러야 한다”라는 취지로 당부한 바 있다. 이때 언급한 원자력 개발은 핵무기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닦은 기초 위에서 실질적인 계획을 발전시키고 실행에 옮겼다. 1969년 5월 원자력청 산하의 원자력위원회가 수립한 원자력연구개발 중장기계획(12년 계획)에는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년~1976년) 기간에 핵 연료주기에 대한 기술연구와 핵연료 안전성 연구를 수행하고, 특히,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년~1981년)이 추진되는 기간 중에 재처리시설을 설치하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재처리시설 계획이 핵무기 개발을 위한 목적으로 추진되었다는 명시적인 증거는 없으나, 원자력에너지가 평화적 목적과 군사적 목적의 이중성이 강하기 때문에 재처리시설이 완성되면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게 된다. 박 대통령은 1971년 11월에 청와대에 경제제2수석비서관실을 신설하고 오원철 수석비서관으로 하여금 과학기술처-국방과학연구소-원자력연구소를 주축으로 방위산업육성정책과 함께 원자력에너지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도록 했다. 

오원철 수석은 핵무기 기술력 확보에 필요한 연구과제를 국방과학연구소,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등 국내 7개 연구기관에 보안유지를 위해 분산시켜 연구를 진행하게 했다. 1972년 9월 8일 오원철 전 수석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원자핵연료 개발계획’ 보고서」는 ‘핵무기의 종류 및 우리의 개발 방향’, ‘고순도 플루토늄 생산방안 비교’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보고서에는 “과대한 투자를 요하지 않고 약간의 기술도입과 국내 기술개발로 생산이 가능한 플루토늄탄을 택함이 타당하다”고 결론 짓고, 원자력발전소는 플루토늄도 얻고 발전도 할 수 있는 ‘중수로(重水爐)형 원자로’를 건설해야 하며, 1974년부터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하여 1980년대 초에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 원자력개발사업을 보면 대체로 이 계획에 나타난 내용대로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핵연료(핵분열 물질) 확보, 핵탄두 설계기술 및 운반체(미사일, 항공기), 이 3가지가 구비되어야 한다.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핵연료인데 우라늄과 플루토늄이 있다. 플루토늄은 원자로에서 나오는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하는 방식으로 확보하는데, 우라늄 농축 방식보다 더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다. 또한 중수로는 경수로형 원자로보다 쉽게 고순도의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다. ‘원자핵연료개발계획’이 핵무기 개발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면 제대로 된 계획이라고 볼 수 있다. 


재처리시설의 확보 추진

우리나라는 이미 원자력청의 원자력연구개발 중장기계획에 따라 미국 웨스팅하우스사가 설계한 가압경수로 방식의 고리 1호기 원자력발전소를 1971년 11월에 착공했다. 이 발전소는 1977년에 완공되었고, 1978년 4월에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원자력발전의 사용 후 연료 재처리를 위해서 1971년에 영남화학(주)이 미국의 NFS(Nuclear Fuel Services)사와 합작으로 재처리사업을 추진하도록 하고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이에 참여했다. 

그러나 재처리시설은 합작선인 미국의 NFS사가 자국 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하여 중단되었다. 1972년 초에는 원자력연구소와 자매결연을 맺은 미국 국립아르곤연구소(ANL)에 재처리 분야의 기술훈련을 요청했으나 응해주지 않았다. 1972년 5월, 당시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이 프랑스와 영국을 방문하여 한・불, 한・영 간의 원자력협력에 관한 공식적인 협의가 이루어지면서 한국원자력연구소가 계획하고 있던 핵연료가공과 재처리에 관한 연구시설의 도입이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의 원자력청(CEA), SGN사 및 CERCA사 등 원자력 관련 업체들과 빈번하게 접촉한 결과, 원자력연구소는 SGN사를 재처리연구시설의 협력선으로 하여 1973년 3월에 시험용 재처리시설의 개념설계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한 달 뒤인 1973년 4월에는 프랑스의 핵연료 제조회사인 CERCA사로부터 기술용역 제의서를 접수했고, 그 후 1974년 10월에 한・불 정부 간 원자력기술협력협정이 체결되었다. 한편, 1973년 3월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캐나다의 중수로 방식 NRX 연구용 원자로 도입을 추진했다.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는 월성 1호기 건설사업에 캐나다의 CANDU(Ca-nadian Deuterium Uranium)원자로와 NRX 연구용 원자로를 패키지(Package)로 공급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특히 우리나라가 캐나다의 NRX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인도가 NRX 연구용 원자로를 이용하여 1974년 핵실험에 사용한 플루토늄을 추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74년 6월 원자력연구소는 핵연료주기연구시설사업을 전담하는 특수사업부서로 분소 형태의 대덕공학센터를 설치했고, 한편 1975년 1월 12일 프랑스 CERCA사와 우라늄 핵연료 성형가공 연구시설의 도입 계약을 체결했으며, 1975년 4월 12일에는 시험용 재처리시설 용역계약을 맺었던 SGN사와 본격적인 재처리시설 건설을 위한 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한편 1975년에 한국원자력연구원은 벨기에로부터 소규모 혼합형(플루토늄-우라늄) 핵연료 가공시설의 도입을 추진했다.

재처리시설의 확보는 처음에는 1969년 원자력청의 중장기계획에 따라 추진되었으나 1972년 오원철 수석의 ‘원자핵연료 개발계획’을 볼 때 그 후로는 중수로 확보와 함께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추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핵무기 개발

1978년 6월에 작성되어 2005년에 공개된 「South Korea: Nuclear Developments and Strategic Decisionmaking(한국: 핵개발과 전략적 의사결정)」이라는 CIA보고서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1974년 12월에 암호명이 ‘890계획’인 핵무기개발계획을 승인한 것으로 나와 있다. ‘890계획’은 미사일 설계와 핵탄두 및 화학탄두 연구를 포함하는 계획으로,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의 책임 아래 미사일팀, 핵탄두팀 및 화학탄두팀의 3개 팀을 구성하여 개발을 추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핵탄두 분야에서는 재외 한국인 과학자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여 1975년 중반까지 탄두 구조, 고폭약 제조, 컴퓨터 코드의 3개 팀을 구성했으며, 박사학위를 가진 과학자 20~30명과 그보다 좀더 많은 기술자들을 확보했고, 화학탄두 분야에서는 1975년 2월까지 10여 명의 주요 연구자들을 확보했다. 반면에 미사일 분야는 1976년 중반까지 250명 이상의 연구원과 기술자를 확보했다고 한다. 

CIA 보고서에는 미사일, 핵탄두 및 화학탄두 개발을 모두 핵무기 개발 계획(‘890계획’)의 일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국방과학연구소가 개발할 핵탄두가 어떤 종류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다고 했다. 핵탄두 설계는 수많은 고폭실험이 필요하며, 실험을 수행할 장소에는 초고속 카메라, 플래시 X-레이 시스템, 오실로스코프 등 정밀기기와 발사대 및 벙커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한국 정부는 몇몇 장비를 획득했지만, 이 장비가 어디에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또한 핵탄두팀은 내부 불협화음과 기술 부족으로 별다른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핵개발 포기

1974년 5월 18일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미국을 비롯한 원자력 수출국들은 런던 클럽(London Club)을 결성하고, 핵 물질 및 장비의 수출과 재처리, 농축, 중수(重水) 생산 등 민감한 기술의 국제간 이전을 제한하는 핵확산금지조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1975년 8월 27일 청와대를 방문한 제임스 슐레진저(James Schlesinger) 미 국무부 장관은 “한미 관계를 손상시키는 가장 유일한 요소가 바로 한국의 자체적인 핵무기 확보 노력”이라며 한국의 핵개발 중단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러한 압박 가운데 1976년 1월 22일~23일 사이에 주한미대사관에서 미 국무부와 우리나라 과학기술처 장관 사이에 재처리에 관한 협상이 있은 다음 한국은 프랑스 SGN사로부터 재처리시험시설 도입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 후 재처리연구시설사업은 우라늄정련・변환시설, 조사(照査) 후 시험시설, 방사성폐기물 처리시설 등으로 대체하여 추진되었으며, 사업 명칭도 ‘화학처리대체사업’이라고 불렀다.

중수로 1기와 함께 도입하려던 NRX 연구용 원자로 도입 계획도 1976년에 캐나다 정부가 한국과의 대화를 중단하면서 결국 틀어졌다. 이로써 중수로 건설과 재처리시설을 연계시켜 건설하려던 원자력에너지개발계획은 무산되었다. 1977년 11월에는 벨기에와 추진하던 혼합핵연료가공사업도 취소되었다.

CIA 문서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핵개발을 포기한 것이 1976년 12월 말이라고 되어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개발 기술이 부족했고, 당장 시급한 개발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았다. 문정인 교수는 C IA 보고서를 분석한 글에서 박 대통령이 핵개발을 중단한 가장 큰 이유는 1975년과 1976년에 미국이 보여준 한국 방위에 대한 확고한 태도와, 핵개발을 계속할 경우에는 한국의 상업용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대한 지원을 끊을 수 있다는 압박이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75년 방한(訪韓)한 슐레진저 미 국무부 장관은 한국의 핵개발이 한미 관계를 심각하게 손상시킬것이고, 소련의 핵공격 목표가 될 것이라고 압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북한이 한국에 대해 무력공격을 할 경우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원조를 제공하고 핵심시설을 괴멸시킬 것을 약속했다. 기자회견에서는 핵우산 보장을 암시하는 발언도 했다. 1976년 8월에는 북한군의 판문점도끼만행사건에 대해 미국은 동해에 대규모 항공모함 함대를 파견하여 무력시위를 하고 B-52 폭격기가 매일 출격해 폭격훈련을 함으로써 북한을 위협하는 한편 한국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1977년 1월 미국 카터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주한미군과 전술 핵무기 철수를 추진했다. CIA 보고서에는 그해 1977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이 미사일 개발 계획을 재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두고 ‘핵개발을 재개’한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CIA 보고서는 핵탄두 프로그램의 재개를 언급하지 않고 ‘미사일 개발재개’에 국한하고 있으며, 핵탄두 설계 작업의 징후는 전혀 없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핵(탄두)개발을 재개’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핵탄두 개발은 재처리시설과 연계하여 진행되어야 의미가 있는데 1976년 재처리시설 도입이 무산된 이후에는 확보를 위한 움직임이 더 이상 없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재처리시설의 도입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는 실질적으로 핵개발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이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켰다가 재개했다”는 1978년 6월의 CIA 보고서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국방과학연구소에서의 백곰 미사일 개발은 1978년 9월 시험발사 성공 때까지 한 번도 중단이나 재개된 사실 자체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정황으로 볼 때 박 대통령은 1976년경 재처리시설 도입이 무산되면서 어쩔 수 없이 핵탄두 개발은 포기한 것으로 보이고, 그 후에도 재개했다는 징후는 없었으며, 미사일 개발은 변함없이 추진했다. 1978년 6월 CIA 보고서가 강조하는 요지는 “한국의 핵개발 재개 여부는 미국의 안보 공약의 신뢰성 여부에 달려 있으며, 만약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핵우산 제공에 대한 신뢰가 약화될 경우 한국의 핵개발은 다시 고개를 들 것”이라는 점을 경고한 것이다. 결국 카터 대통령은 1979년 한국을 방문한 후에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백지화했다.


상업용 원자력에너지의 개발 지속

한편 한국원자력연구소는 1976년에 재처리시설 도입을 중단했지만, 재처리를 제외한 나머지 핵연료주기개발계획은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1976년 12월 1일 대덕공학센터를 한국핵연료개발공단으로 독립하여 재처리시설을 제외한 여타 핵연료주기를 완성하기 위해 ‘화학처리 대체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우라늄정련・변환시설, 조사 후 시험시설, 방사성폐기물 처리시설 등의 도입을 추진했다.

조사 후 시험시설의 경우 사용 후 연료와 플루토늄을 취급하는 곳이고, 재처리에 활용될 기술도 있어서 미국의 감시를 많이 받았다. 1977년 6월에는 캐나다형 중수로(CANDU) 방식의 월성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착수했다. 1977년 11월 프랑스와의 차관계약을 수정하여 체결하고 그해 6월에는 SGN(후에 COGEMA와 합병)사와 이미 체결한 기술용역계약도 발효되었다.

CERCA사와의 계약으로 추진되었던 10톤 규모의 핵연료(우라늄 핵연료) 성형가공시험시설은 계획대로 추진되어 1976년에 설계를 완료하고 외자 280만 달러(1,300만 프랑)와 내자 약 9억원으로 핵연료 가공기기를 구매했으며, 1978년 10월에는 연건평 1,200평의 시험시설을 완공했다. 이렇듯 평화적 이용을 전제로 한 핵연료주기개발은 재처리 분야를 제외한 채 박 대통령이 서거하기까지는 중단 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 서거에 이어 1980년에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면서 원자력개발은 수난을 맞게 된다.






1980년 9월에 이정오 장관이 과기처 장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취임 직후 한 달 만에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과기처는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하는 대신에 원자력이라는 단어를 연구소 명칭에서 빼고 한국에너지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리고 서울 태릉에 위치해 있던 연구소를 대덕의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통폐합하여 대덕으로 이전하고, 원자력안전센터(현재의 원자력안전기술원)를 설립하는 등의 방법을 동원했다.

이러한 조치는 미국의 압력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외형상 서울의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덕분에 한국원자력연구소의 과학자들은 국방과학연구소의 미사일 과학자들처럼 해고당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하면서 상업적 원자력발전기술의 자립화에 투입될 수 있었다. 이후 1985년~1996년에 영광 3・4호기 건설을 통해 한국형 표준원전 설계기술 개발을 추진하여 기술자립에 성공했고, 이를 울진 3・4호기에 적용함으로써 그 기술력을 증명했다. 

이로써 한국에너지연구소는 완전히 재도약하여 2009년에는 한국형 원자력발전소를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까지 하는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한국의 핵개발 방향은 크게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장기 원자력개발계획에 따라 상업용 원자력발전소를 건립하고 그에 따라 사용 후 연료 처리를 위한 재처리시설을 자연스럽게 확보하는 흐름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미사일 개발과 함께 핵탄두 개발을 위한 비밀계획을 추진한 것으로 보이는 흐름이 있었다. 

그러나 핵무기 개발계획은 미국의 압력으로 중단한 것으로 추정되며, 평화적 핵개발 분야만이 지혜롭게 대처하여 살아남았다. 당시 미사일 개발도 한미 미사일 지침에 따라 중거리 이하로 탄두크기와 사거리의 제한을 받았는데, 민수용 위성발사체나 군사용 탄도미사일의 경우는 기술 요소가 같고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함께 견제를 받아왔고, 그로 인해 우리나라 민수용 위성발사체의 기술 발전은 상대적으로 더디다고 볼 수 있다.


< 전편 - 한국방위산업진흥회의 설립 >
< 다음편 - 미사일 개발 >


                                           < 연 재 순 서 >


PART 1 방위산업의 역사 / 서우덕 •16

Chapter 1 방위산업이 태동되기까지 •19

1. 1・21사태(김신조사건)•19
2. 미국 푸에블로호 납치사건•21
3.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23
4. 미군 정찰기 격추사건•24
5. 닉슨 독트린과 주한미군 철수•26
6. 자주국방과 방위산업: 불가피한 선택•29


Chapter 2 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31

1. 방위산업을 향한 첫발•31
2. 국방과학연구소(ADD)의 창설•35
3. 최초의 방위사업: 번개사업•47
4. 초기 방위산업 시설 및 공업단지•51
5. 방위산업 육성의 밑그림과 제도 구축•55
6. 우리나라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64
7. 율곡사업(‘국방 8개년 계획’)과 기본병기 국산화•81
8. 방산기술의 발전•90
9. 방산기술인력 양성•102
10. 한국방위산업진흥회의 설립•111



Chapter 3 방위산업의 시련과 도전•119

1. 핵개발•119
2. 미사일 개발•127
3. 전두환 정권과 국방과학연구소의 구조조정•141
4. 획득환경과 제도의 변화•144
5. 2차 율곡사업과 한국형 무기체계 개발•146


Chapter 4 방위산업의 안정과 성장•149

1. 3차 율곡사업과 첨단전력 확보•149
2. ‘818 군구조 개편’과 전력・획득조직 개편•151
3. 한국방위산업학회의 설립•153
4. 율곡사업 감사•158
5. 국외도입사업과 무기중개상•164
6.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의 방위력개선사업제도 개선•168


Chapter 5 방위산업의 경쟁과 도약•178

1. 국방획득제도개선과 방위사업청 신설•178
2. ‘국방개혁 2020’과 전력증강 방향•184
3. ‘국방개혁 307계획’•189
4. 방위산업 신경제성장 동력화•192
5. 업체 주관 개발의 활성화와 글로벌 도약의 시작•915
6. 방위사업의 투명성•198
7. 방위산업은 그래도 꿋꿋하다•201



PART 2 방위산업의 발전과 성과 / 서우덕.장삼열 •202

Chapter 1 방위산업 정책 및 제도의 변천•205

1. 방위산업 발전의 시대 구분•205
2. 역대 정부의 방산 육성정책•209
3. 국방획득조직의 변천•225
4. 국방획득 의사결정 기구의 변천•245
5. 방위사업수행체제의 발전•251
6. 방위산업 보호·육성정책•261
7. 방위산업의 개방 및 경쟁체제화•274


Chapter 2 분야별 방위산업 형성과 발전•283

1. 탄약 업체•283
2. 기동・화력장비 업체•288
3. 함정건조 역사와 함정 업체•296
4. 항공기 생산・정비 업체•308
5. 유도무기・로켓 업체•321
6. 통신장비 업체•327
7. 지휘통제(C4I)체계/전투체계 업체•333
8. 감시정찰 분야 업체•338
9. 화생방 분야 업체•344


Chapter 3 방위산업의 성과•346

1. 국산 명품 무기체계•346
2.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현황 및 위상•349
3. 방산수출•356
4. 방위산업의 기술파급 및 산업파급효과•360


Chapter 4 우리 방위산업의 특징과 발전 방향•372

1. 우리 방위산업의 특징•372
2. 방위산업 발전 방향과 전망•377



PART 3 국산 무기체계의 개발 / 신인호 •380

Chapter 1 소화기•383

1. 개인화기•383
2. K3 / K12 / K6 기관총•388
3. 유탄발사기와 소총의 복합화•393
4. 복합형 소총 - 세계 최초 개발•936
5. 특수목적 소총과 권총•399

Chapter 2 화력무기•402

1. 견인포•402
2. 자주포•408
3. 탄약운반장갑차•420
4. 박격포•423
5. 다연장로켓•428

Chapter 3 기동무기•432

1. 전차•432
2. 장갑차•450
3. 차륜형 장갑차•473
4. 상륙돌격장갑차•476

Chapter 4 함정•482
1. 수상함•482

Chapter 5 항공기•513

Chapter 6 유도무기•540

1. 지대지유도무기•540
2. 순항미사일•546
3. 스마트폭탄 KGGB•560
4. 어뢰•562

Chapter 7 방공무기•580

1. 대공포•580
2. 대공유도무기•589

Chapter 8 지휘통제 및 통신•601

1. 통신장비•601
2. 두뇌와 중추신경 C4I•613
3. 데이터링크 - 네트워크 중심 작전환경 구현•166

Chapter 9 무인체계•621

1. 로봇과 무인(無人)•622
2. 병사도 디지털 환경에 연동•628
3. 무인수상정 및 무인잠수정•631
4. 하늘의 로봇, 무인항공기•634
5. 경제성도 높이고 전투효과도 올린다•641

Chapter 10 감시정찰 및 전자전 무기체계•642

1. 전자전 체계 •643
2. 레이더 체계•646
3. 합성개구레이더(SAR) 체계•651
4. 전자광학/적외선(EO/IR) 센서•652
5. 수중감시체계•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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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학회 정기총회, '창조경제 실현, 민군기술협력이 정답'
한국방위산업학회(회장 채우석)는 3월 24일(목), 국방컨벤션에서, 국방부, 방위사업청, 방산업체, 학계 등 관계관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26차 정기총회 및 정책토론회를 개최하였다.이날 행사는 제1부 이사회 및 정기총회 제2부 정책토론회, 제3부 만찬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정책토론회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김인우 박사 (전,국방과학연구소 민군협력진흥원장)는민군기술협력현황과 발전방향을 주제로 발표하였다.김박사는 민군기술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민군기술협력은 첨단과학기술을 가장 효과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방법이라고 전제하면서 급변하는 미래 안보환경에 대비하고 국가 경제 발전과 창조경제 실현을 위해 국가 과학기술력을 총동원하는 민군기술협력의 전폭적인 확대가 요구된다고 말했다.두 번째 주제발표자로 나선 고경찬 박사(벤텍스 대표)는 섬유 신소재기술의 국방 분야 적용방안에 대해 발표했다. 고박사는발표에서 우리나라의 섬유 신소재 기술은 세계적 수준이며 많은 특허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 소개하고보온, 발열, 방수 등 가볍고 내구성, 보온성이 뛰어난 첨단 기능성 소재를 군의 피복이나 침구류 ,장구류에 적용하면 장병들의 체력과 전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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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사업청, 국방관련업체 현장맞춤형 목록교육 실시
방위사업청(청장 장명진)은 4월부터 12월까지 국방관련 업체를 대상으로 목록분야에 대해 업체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실시하는 '현장맞춤형 목록교육'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목록화'는 군수품에 대한 제원을 일정한 형식과 체계에 따라 분류하고 관리하는 업무로 목록화된 자료는 군수품 조달, 저장, 보급, 정비 등에 활용된다.현장맞춤형 목록교육은 국방관련 업체가 목록화 업무수행에 대한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업무절차, 국방표준종합정보시스템 사용법에 대해 업체가 요구할 경우 현장에서 일대일 맞춤형으로 업체의 수준에 맞춰 진행된다.국방표준종합정보시스템(KDSIS)은 군수품 목록정보, 국방규격, 기술자료를 통합하여 표준화 업무의 전 과정을 온라인화하여 제공하는 시스템이다.또한 업체 편의를 위해 방위사업청 규격팀과 협업을 통하여 국방규격분야 교육도 업체가 요청할 경우 동시에 지원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방위사업청 홈페이지에서 확인이 가능하다.방위사업청 군수정보관리팀장(부이사관 백광석)은 “이번 교육을 통해 방산분야기업이 목록업무 수행능력이 크게 향상될 것으로 생각하며, 이를 통해 무기체계의 적기 전력화와 효율적인 운영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방위산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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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뉴스


해군, '제1회 서해 수호의 날' 한미연합훈련 실시

해군은 3월 25일(금) 제1회 서해수호의 날을 맞아 서해 NLL을 지키다 산화한 전우들의 영해사수 의지를 기리고 북한의 도발위협에 대한 단호한 대응의지 시현을 위해 동서남해 전 해역에서 대규모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했다.이날 제2연평해전과 천안함 피격사건이 발생한 서해에서는 해군2함대사령부 주관으로 한미 연합훈련을 실시해 북한의 도발에 대한 한미 동맹의 확고한 응징의지를 과시했다.서해 훈련에는 우리 해군의 이지스구축함 세종대왕함을 비롯해 신형 호위함, 초계함, 유도탄고속함 등 수상함 7척과 잠수함, P-3 해상초계기, 링스 해상작전헬기가 참가했고 미국 해군의 이지스구축함 2척도 훈련에 동참했다.한ㆍ미 양국 해군은 해상으로 침투하는 적의 특수전부대를 바다에서 격멸하는 대특수전부대작전(MCSOF)훈련, 대잠전훈련, 함포 및 폭뢰 실사격훈련 등 실전적 훈련을 통해 북한의 해상도발에 대한 연합작전 수행능력을 제고했다.훈련을 지휘한 박동선(준장) 제2해상전투단장은 “서해수호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전우들의 숭고한 뜻을 이어 적이 또다시 도발하면 강력한 화력으로 처절하게 응징할 것”이라며, “해군은 우리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