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룡 숙명여대 안보학 교수
국가 간에 동맹이 결성되는 주된 이유·는 두 나라가 특정 국가를 공동의 적 이라고 간주하고 함께 대응할 것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과 일본은 이런 조건에서 벗어난 형태로 동맹을 체결하였다. 공식적으로는 두 나라 사이에 ‘미·일 안전보장조약’ (Treaty of Mutual Cooperation and Security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Japan)이 체결되면서 동맹관계가 시작되었다.
이 때가 1952년이었고, 1960년에 새로운 조약이 탄생되면서 구 조약은 효력을 잃었다. 두 조약의 전체적인 맥락은 같으나 차이점은 대체로 주일미군의 주둔 요건과 관련 있다. 구 조약은 주로 미국의 일방적 요구가 반영되었다. 그 요점은 일본 영토 내에 미군 주둔을 허용하되 다른 제3국에게는 어떠한 군사시설이나 기지도 미국의 승인 없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일본 내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소요 사태 (large scale internal riots and disturbances) 에서도 일본 정부의 요청이 있다면 미국이 이를 진압하는 활동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미국이 일본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가진다는 것을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1960년의 신 조약에서는 일본 내부의 소요사태 지원 조항이 삭제되었고, 양국의 불평등성을 개선하기 위해 상호 방위임무를 더 구체화하고, 미국이 군사동원 하는 경우 일본에 사전 통보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이에 더하여 조약 이름에 mutual cooperation 이라는 키워드가 추가되면서 양국의 포괄적 협력 의지도 내용으로 담았다.
양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새롭게 개정해야 하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배경은 미국에 대한 일본 사회의 비판론 때문이었다. 일본 내의 진보세력들은 미국이 군사시설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면서 크게 저항하였다. 구체적인 쟁점은 오키나와 미군시설에 대한 반대였다. 결국 이 문제는 신 조약에서 국제연합의 원칙과 목표를 준수한다는 것, 미군의 배치 조건을 언제든 협의한다는 것, 발효기간을 10년으로 제한하는 것 등을 명기함으로써 미국의 일방적 주둔 조건을 제한하고 일본의 독립적 지위를 확보하는 효과를 남겼다.
신 조약에 따르면 조약 발효 10년경과 후 어느 일방이 종료를 선언하면 그로부터 1년 후에 폐기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발효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미·일 동맹의 결속력은 더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일본보다는 미국이 동맹 필요성에 대해 더 애착을 보이는 듯하다. 물론 일본 역시 미국과의 동맹을 약화시킬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흔히 19세기는 동맹이 번성하던 시기라고 한다. 이 말은 유럽의 지역정치 특성을 잘 대변한다. 제1, 2차 세계 대전을 벌어지던 시기의 유럽에서는 국가들 사이에 제휴와 배신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라는 말은 그만큼 국가 관계가 이익 중심으로 변화무쌍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동맹의 지속성은 비교적 짧았고, 결속력 또한 강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유럽에서도 동맹외교가 가장 극에 달한 시기는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보불전쟁’ (프러시아-프랑스 전쟁; 1870-1871년) 이후 유럽의 질서를 세력균형 방식으로 관리하던 때였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복수전쟁을 벌이지 않도록 억누르기 위해 주변 여러 나라와 거미줄처럼 복잡하고 다중적인 동맹관계를 결성하였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여 1873년 소위 ‘삼제동맹’을 결성하면서 유럽은 변화무쌍한 동맹정치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삼제동맹’ 체결 후 불과 2년이 지난 1875년 러시아는 독일의 독주에 불만을 품게 되고 결국 187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러시아와 결별하여 새로운 동맹 체제를 형성했다. 이후 1882년에는 이탈리아가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가담하게 된다. 1892년 러시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고, 1904년에는 영국이 프랑스와, 그리고 1907에는 영국이 러시아와 동맹을 체결하게 된다. 이 경우에서 보듯 당시의 동맹은 외교의 한 방책으로 서로 제휴하는 형태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동맹의 결속력과 응집력이 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20세기의 동맹구도는 대체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형성된 질서가 장기간 유지되는 모습을 보였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냉전구도의 골이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 탈냉전 시기가 도래했다고 말하지만 아직도 정치-군사적 차원에서의 대립구도는 그대로 지속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미국은 유럽과의 연대를 지속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중국이 여전히 전략적 제휴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새로운 동맹이 결성되는 사례도 줄어들었고, NATO와 같은 다자동맹은 적대진영이 해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맹 목표를 수정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과거에 체결된 동맹이 약화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필리핀의 동맹관계 약화,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해체, 중국-북한, 러시아-북한 관계에서 보듯 동맹 결속력이 약화되는 사례도 관측된다. 미일 동맹은 NATO나 한미동맹과 유사한 모습으로 변신을 계속하고 있다. 동맹의 목표와 가치를 수정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창출하고 동맹 결속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행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의 패권적 입지가 약화되지 않고 강한 모습으로 유지되는 것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일본, 한국, 유럽 국가들은 이러한 미국의 지위 아래에서 ‘편승’ (bandwagoning)하고 싶은 것이다.
2015 ‘방위협력지침’, 어떤 내용인가?
미일동맹에서 ‘방위협력지침’은 상호방위조약에서 천명한 군사협력을 실제에서 구체화하는 가이드라인이다. 조약은 동맹을 체결하기 위한 선언적 약속이다. 이 약속 아래에서 군사협력을 실제에서 추진하려면 구체적인 행동 지침이 필요하다. 처음 이 지침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때는 냉전 시기였던 1978년이었고, 이어서 탈냉전 시기가 시작되자 1997년에 두 번째 개정안이 나왔으며, 2015년에는 세 번째 개정안이 나오게 되었다. 한 가지 특징은 개정안이 나올 때마다 일본의 군사 역할이 확장되는 것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안보환경의 시대적 흐름이 일본을 ‘보통국가’ 혹은 ‘정상국가’로 발전하는 것을 요구하고, 미국이 이 흐름을 선도하거나 추인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이를 선도하였다면 과연 이 선택은 옳은 것인지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다. 일본이 이 방향을 선택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일본의 국력과 위상이 신장된 것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어느 나라든 지금의 일본과 같은 처지라면 대외적으로 힘을 투사하고 국격을 높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본의 이러한 선택이 지역안보를 저해하고 세계 안보에도 결코 좋지 않은 결과를 파급시킨다는 점이다.
2015년 4월 27일, 미국과 일본은 ‘미일방위협력지침’의 세 번째 개정안을 발표했다. 그 핵심 내용은 아시아에서 일본의 군사 역할을 확대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중국과 일본이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도서지역은 물론 아시아 주변지역의 군사행동에 대해 두 나라가 ‘동맹조정 메커니즘’ (Alliance Coordination Mechanism)을 통해 공동 작전을 벌인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군사력 강화와 관련된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화한다는 조항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1978년에 처음 방위협력지침이 만들어졌을 때의 취지를 점차 확대, 발전시킨 것이다.
처음 제정되었을 때의 취지는 당시의 냉전 상황을 반영하여 구소련의 공격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일본 자위대의 역할을 명시하는 것이 중점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공격이 임박했을 때와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로 구분하여 미국과 일본이 어떻게 작전을 전개할 것인가를 규정하였다. 특징적인 대목은 실제로 공격이 감행되었을 때 분쟁 급 수준의 공격에서는 일본 스스로가 자력으로 방어 작전을 전개하고, 더 강도 높은 수준의 공격에 대해서는 미국과 일본이 공동작전을 펼친다는 것이다.
냉전이 종식되자 세계 안보환경은 급변했다.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일본은 이미 130억 달러에 해당하는 거금을 지원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북한이 핵무기 위협 국가로 등장하는 등 세계 및 지역 안보정세가 급변했고, 이것이 1997년 2차 개정을 낳게 되었다. 요점은 일본 자위대의 군사 활동을 동아시아 지역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2차 개정에서는 일본 주변지역에서의 군사위협 상황이 추가로 포함되었다. 일본 영토에 대한 직접 공격 위협이 아니라 난민 보호와 수색 및 구조 활동, 민간인 철수 작전 등이 군사적 임무의 주된 과제로 상정되었다. 그리고 미군의 군사작전을 후방에서 지원하고, 해상에서의 기뢰 제거와 정보 수집 등 지원 활동을 펼친다는 것이다.
제2차 개정안에서 특징적인 대목은 부록에 일본 주변지역에서의 군사협력 내용을 표로 작성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한편, 이번 이루어진 3차 개정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과 일본이 동등한 동맹국 지위 아래에서 아시아 지역의 군사안보 활동에 적극 협력한다는 내용이 골자를 이룬다. 그리고 방위협력지침은 필요에 따라 군사협력의 범위와 세부 활동을 수정 및 개정하도록 되어 있어, 앞으로 일본의 군사 활동을 더 확장시킬 수 있는 준거로 작용할 수 있다. 이로써 제2차 대전 패전국 일본은 그동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억눌렸던 군사주권을 정상적으로 회복하는 것은 물론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고 새로운 강자로 군림하기 위한 입지를 확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5‘미일방위협력지침’ (The Guidelines for U.S.-Japan Defense Cooperation) 내용은 총 8개 장 (chapter)으로 구성된다. 제1장은 방위협력의 목표 또는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서, 다음 문장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Japan will possess defense capability on the basis of the "National Security Strategy" and the "National Defense Program Guidelines". The United States will continue to extend deterrence to Japan through the full range of capabilities, including U.S. nuclear forces. The United States also will continue to forward deploy combat-ready forces in the Asia-Pacific region and maintain the ability to reinforce those forces rapidly.”
그동안 일본이 ‘보통국가’로의 지위 회복을 외쳐왔던 만큼 이번 지침에서 미국은 일본이 자신의 안보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을 구상할 수 있고, 또 필요한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그동안 일본이 ‘전수방어’ 개념에 고착되어 있었고 일본 영토 너머에서 전개되는 안보문제는 미국이 전담하였지만 이번에 이런 공식을 깨버린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핵 억제력을 제공하는 한편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전투력을 유지하고 강화해 나갈 것을 약속한다.
이 의미는 미국이 광활한 아시아 지역에서 군사적 패권을 강화하겠지만 일본 방어문제는 일본 스스로의 자력으로 전담하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본다. 마치 과거의 ‘닉슨 독트린’과도 유사한 부분이 있다. 미국의 피로도가 증가하는 만큼 동맹국 각자가 자신의 방어문제를 전담하고 미국은 뒤에서 지원하는 쪽으로 선회하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표현은 ‘미·일동맹의 글로벌 성격’ (the global nature of the U.S.-Japan Alliance) 을 언급한 대목이다.
이 표현은 미일동맹이 아시아 지역을 넘어서 글로벌 수준에서 협력을 추진할 어젠다가 있다는 것을 가정한 것이다. 잘 알다시피 일본은 결코 아시아 지역에 한정되는 국가가 아니다. 과거에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그들이 말하는 ‘생존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세계 전체와 교류해야 하는 글로벌 국가로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국가 위상을 미국이 간파하고 글로벌 안보 파트너로 끌어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제2장은 방위협력 전제와 원칙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며, 4가지 항목으로 기술된다. 첫째, 미일 상호방위조약과 미일동맹의 기본 정신은 그대로 유지된다. 둘째, 국제법과 유엔 헌장 정신을 계승하고, 개별 국가의 주권 평등과 분쟁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준수한다. 셋째, 각자의 국내법 원칙에 부응하며, 특히 일본의 ‘비핵3원칙’과 ‘전수방어’ 원칙을 준수한다. 넷째, 방위협력 지침을 기준으로 어떠한 법적 행정적 조치도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이 4가지 원칙을 자세히 보면 과연 그대로 지켜질까 하는 의문이 앞선다.
우선 일본의 전수방어 원칙을 고수하면서 어떻게 아시아 지역에서 방위협력을 추진할지가 의문이다. 아마도 미국이 필요한 군사행동을 선도적으로 하고 일본이 보조 역할을 하면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원칙은 주변국들의 비난과 국내 비판세력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된다. 또 하나, 방위협력 지침을 이용하여 파트너 국가에게 어떠한 강요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어디까지나 선언적 의미에 불과하다고 본다. 현실로 들어가면 미국의 정책방향에 따라 일본이나 한국과 같은 동맹국은 행정적 법적 적응조치를 강구해야 할 때가 많다. 예컨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THAAD 문제만 해도 그렇다. 미국이 이 무기를 배치해야 한다고 결정하면 일본이나 한국은 그것을 수용하고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3장은 동맹 조정에 관한 내용이며, 총 3가지 분야에서의 조치가 제시된다. 첫째, ‘동맹조정체제’ (Alliance Coordination Mechanism)를 신설한다는 것이다. 이 기구의 필요성은; “This mechanism will strengthen policy and operational coordination related to activities conducted by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and the Self-Defense Forces in all phases from peacetime to contingencies.” 라고 설명한다.
즉, 우발적인 상황에 대비하여 구체적으로 군사협력을 꾀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런 기구는 한미동맹에서 ‘연합사령부’를 설치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라고 본다. 한미동맹의 연합사령부와 같은 견고한 공동작전 사령부는 아니지만 군사정보를 공유하고 군사행동을 협의하기 위한 기구이므로 형태만 다를 뿐 사실상 미국이 주도할 것이므로 같은 내용이라고 해석된다. 만일 한국이 작전통제권을 미국으로부터 찾아온다면 대략 이와 유사한 협력기구가 필요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구가 신설된다는 것은 일본의 군사역량을 실질적으로 강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원칙 하에서 군사작전에서의 조정과 협력을 (locating operational coordination functions to strengthen cooperation) 구체적으로 시행한다는 것이 둘째 항목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셋째 항목에서는 양국의 안보정책 협의 체널 (SCC; The Security Consultative Committee)을 구성한다고 규정한다.
이 회의체는 처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고 1978년 제1차 방위협력지침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미 작동되고 있었다. 이 회의체는 한미동맹의 ‘안보협력회의’ (Security Consultative Meeting)와 유사한 것이다. 다만 일본의 SCC는 SCM처럼 매년 정기적으로 1회 개최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양국의 군사작전을 기획하기 위한 협의체로 기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미동맹에서는 SCM이 양국 국방장관이 주관하는 최고 결정기구인데 반해 미일동맹에서의 SCC 는 새로 신설되는 ACM의 하위 군사협의체로 작동하게 된다.
제4장은 일본의 평화와 안보에 관한 역할을 규정한다. 이 내용의 전체적인 흐름은 일본이 왜 군사안보 분야에서 역할을 확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기술한다. 양국의 상호안보조약에서는 일본이 외부의 적이 일본 영토를 침략할 때를 제외하고는 군사행동을 취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져서 이제는 외부 안보환경이 변화됨에 따라 일본이 군사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변화를 몇 단계의 국면으로 구분하는데, 첫째는 평화 시기의 협력조치이다.
이 단계에서는 안보 정세 파악을 위한 정보수집 및 정찰활동, 방공 및 미사일 방어, 해양안보, 자산보호와 병참 지원, 군사훈련 등에서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설정한다. 둘째는 일본에 대한 위협이 증가하는 것에 대한 공동 대응이다. 이 단계에서는 양국 국민을 제3국으로부터 철수시키는 작전, 해양안보 활동, 일본 영토로 진입하는 난민 보호활동, 군사 수색과 구조 활동 등에서의 협력을 설정한다. 셋째는 일본에 대한 군사적 공격이 가해질 때의 대응이다.
이 단계에서는 세부 가정 상황이 설정된다. 우선 일본에 대한 공격이 예상될 때이다. 이때에는 외교 수단을 총동원하여 위협을 제거하고 위기 상황을 해소하는데 주력한다. 다음은 일본에 대한 공격이 실제로 가해질 때이다. 이때는 근본적으로 일본이 자국의 영토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전개하고 미국은 이를 지원한다. 그리고 군사작전의 영역을 지상전투, 해상전투, 공중전투 등으로 구분하여 필요한 협력 조치들을 강화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대목은 핵무기와 미사일 방어에서 미국과 일본이 긴밀히 협력한다는 것을 명시했다는 점이다. 특히 북한의 핵 및 미사일 위협이 구체화됨에 따라 미일동맹 차원에서 공동 작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협의 실체를 더 세부적으로 해부하면서 화생무기 위험, 방사능 위험과 핵 방어 등을 묶어 CBRN (chemical, biological, radiological, and nuclear) 으로 제시한 것이다. 넷째는 일본 이외의 국가가 공격을 당했을 때의 대응이다. 이 단계에서도 일본이 역할을 담당한다고 규정한다. 아마도 이 대목이 가장 큰 쟁점이라고 여겨진다. 방위협력지침에서는 일본과 우호적인 나라가 공격을 당했을 때로 가정하므로 이것은 한국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본다. 이 단계에서도 미국과 일본은 필요한 군사작전에서 협력을 강화할 것을 규정한다. 다섯째는 일본에서 재난이 발생하는 경우이며, 미일동맹 차원에서 필요한 협력을 강구한다고 설정한다.
제5장은 아시아 지역 및 글로벌 수준에서의 안보협력을 설정하는 내용이다. 서설에서 두 나라가 지역과 세계안보를 위해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In an increasingly interconnected world, the United States and Japan will take a leading role in cooperation with partners to provide a foundation for peace, security, stability, and economic prosperity in the Asia-Pacific region and beyond.”) 이 말의 뜻은 미국이 주도하는 역할에 일본도 거들어야 한다는 의미이겠지만 어제의 전범 국가가 오늘의 세계 평화를 말할 수 있으며, 그러한 여건이 실제로 조성되어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을 포함하여 중국과 주변국들이 크게 우려하는 부분도 바로 이 대목이다. 두 나라의 협력은 구체적으로 평화유지 활동, 인도주의적 지원활동과 재난 구호활동에서의 협력, 그리고 해상수송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해적 소탕작전, 지뢰 제거, 대량살상무기 확산 저지 등에서의 협력으로 나타난다.
제6장은 우주와 사이버 공간에서의 협력 조치로 구성된다. 그리고 제7장은 양국의 방위산업 분야와 IT 분야, 교육 및 연구 활동 분야 협력 조치들을 포함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방산분야 협력은 앞으로 일본의 첨단 군사력이 강화되는 것을 미국이 주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군비경쟁이 본격화 될 것을 예고한다. 일본의 과학기술이 세계 첨단수준을 달리고 있고, 축적된 군사기술 및 지식과 결합된다면 세계 2위 3위권의 군사력을 확보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7장에서는 양국이 설치하기로 합의한 협의체 SCC에서 방위협력지침의 실행 계획을 주기적으로 평가하고 개선 및 보완하는 조치를 강구한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미·일 동맹 왜 강화되나?
미국은 왜 이처럼 일본을 호의적 파트너로 생각하는 걸까? 미국의 세계전략 구상에 초점을 맞춰 풀이한다면 전혀 엉뚱한 발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냉전 시기부터 미국은 대륙의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 해양 제패를 전략 목표로 제시해왔다. 유럽에 NATO가 있다면 아시아에서는 필리핀과 일본이 미군의 거점으로 중요시되었고 해양을 제패할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했던 것이다. 지정학 측면에서 볼 때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 간주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한반도를 구소련과 함께 분할 점령한 것도 일본을 거점으로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냉전 시기에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팽창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거점으로는 단연 일본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냉전 질서가 종식된 지금 중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패권 지위를 강화한다고 인식되므로 이것을 저지해야 한다는 새로운 전략 목표가 생성된 것이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 개념으로 소위 ‘재균형’ (Rebalance)이라는 키워드가 제시되었다.
미국이 세계를 관리하는 전통적 구상은 패권적 지위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라이벌 강국을 등장시켜 양극 구도 (bipolar)로 관리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패권을 차지했던 국가는 결국 쇠퇴의 길을 걸었고, 잘못하면 보통 국가 이하로 전락할 위험에 처했다. 그래서인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초강대국 지위에 오른 미국은 패권 지위보다는 미국과 비슷한 지위의 초강대국을 라이벌로 등장시키는 것을 더 선호한다. 그래야 군사력 유지에 도움이 되고, 군사무기의 혁신도 이룰 수 있게 된다. 이것 말고도 양극 질서의 장점은 의외로 많다.
군사전략 전술도 비교적 단선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고, 국가 내부의 정치적 통합도 만들어낼 수 있다. 예컨대 안보문제에 대해서는 정치권에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가능하고 국민의 애국심도 고양시킬 수 있다. 냉전 시기에 미국은 구소련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을 끌어들였고, 같은 방식으로 이제는 중국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구소련이 몰락하면서 그 내부의 실체가 드러났을 때 의외로 그 국력이 허약한 것을 보고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군사력과 무기를 제외하고는 경제 사회 전반에서 취약점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미국은 중국을 새로운 라이벌로 간주하고 있다. 근래에 거둔 중국의 경제 성장과 경제력을 놓고 보면 누군가 이것을 제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경제력이 신장되면 당연히 군사력도 강해진다. 더구나 중국의 정치제도가 독특한 집단체제 노선을 구축하면서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다. 대략 10년 주기로 정치권력이 안정적으로 이양되는 패턴을 구축한 것은 중국의 저력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정치력은 중국의 패권 지위를 강화시키는 원동력이다. 미국이 중국을 라이벌 강국으로 간주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미국의 전통적 세계전략 구도에서 보면 중국의 힘이 크게 강화되는 것은 분명 우려할 만한 일이면서도 일면 미국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을 견제한다는 새로운 목표가 설정되고, 이 목표를 위해서 외교안보 전략을 비교적 단선적으로 구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극질서 역시 미국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방안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예민한 관리 기법이 요구된다. 다수의 강대국이 공존하는 질서는 19세기의 유럽에서 전개되었으나 그 끝은 세계 대전이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더구나 미국의 지위가 다수의 강대국을 허용할 만큼 그렇게 허약하지도 않다. 군사력 지표만을 놓고 볼 때 이미 미국은 압도적 지위에 올라있고 당분간 미국에 필적할 강대국 후보도 보이지 않는다.
고작해야 러시아, 중국인데 중국의 군사력이 질적으로 미국에 맞서기 위해서는 적어도 20년 이상은 되어야 한다. 냉전 질서가 종식된 후 러시아가 제2군 강대국으로 후퇴하였으므로 더 이상 미국의 라이벌 강국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중국이 강력한 후보국으로 떠올랐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미국이 이렇게 간주하는 것을 중국은 터무니없다고 불평한다. 중국의 고위급 관리들이나 학자들은 토론하는 자리에서 하나같이 같은 목소리를 낸다. 그 메시지는 미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과도한 군사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일본을 이끌어내려는 의도와 행동에 대해서는 거의 분노를 표출할 만큼 민감하게 반응한다. 중국 측이 이렇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시위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국이 전략을 수정할 리가 없고, 그래서 중국도 군사력 강화에 나설 수밖에 없다. 미국을 비난하면서도 이에 맞서야 한다는 의식이 발동될 것이고, 이것은 결국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촉발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제 우리는 세계질서의 새로운 ‘판’을 바라봐야 하는 형국에 놓이게 된 것이다.
새로운 아시아 ‘판’의 부작용!
미국이 일본과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동기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이다. 즉 중국 봉쇄정책의 신호탄이라고 봐야한다. 미국 단독으로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너무 부담이 크다. 군사적 패권은 유지되지만 경제력에서 중국에 밀리기 시작했으므로 파트너십이 필요하고, 일본은 미국의 욕구를 채워줄 적임자이다. 미국이 일본을 끌어내면서 중국이 크게 반발하고, 또 다른 동맹국 한국이 불편해하는 것을 잘 인지하면서도 걸음을 재촉하는 것을 보면 그 만큼 미국이 다급하고 또 힘에 부친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북한 문제를 놓고 미국이 중국과 줄다리기 하면서 불만이 증폭된 것도 한 원인일 것이다. 북한 문제에 관한 한 미국은 다급하다고 보는 반면 중국은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을 뿐 아니라 오로지 ‘6자회담’의 개최만을 반복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일본을 끌어내어 아시아에서 새로운 ‘판’을 형성한다면 대체로 중국과 미·일동맹이 대치하는 구도가 될 것이다. 미국은 세계를 관리하는 입장에 있으므로 큰 구도를 짜는 데에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구도 내에서 어떠한 형태의 예민한 문제들이 발생하든 그것은 관리와 조정 작업으로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다고 볼 것이다. 예컨대 한국이 일본의 등장을 불편해하거나 두려워하는 문제, 중국이 일본과 맞서기 위해 군사 대비태세를 강화하는 문제, 일본이 주변국과의 영토 분쟁을 고조시키는 문제, 이런 문제들은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심각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대목이 미국이 구상하는 대전략의 취약점이라고 본다. 그동안 미국이 일본의 군사력을 묶어두고 아시아 강자로 군림하던 구도에서는 지역 내에서 벌어질 소지가 있었던 분쟁문제들이 잠복한 상태로 눌려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보통국가’로 날개를 다시 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경제역량으로 외교를 지탱하던 일본은 이제 군사역량을 추가하여 외교입지를 제고할 것이 뻔하다. 그것은 일본이 주변국과 마찰을 빚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미국을 등에 업고 자국의 이익에 부합되는 쟁점들을 차례로 만들어 내면서 다시 강대국으로 군림하고자 할 것이다.
한국 사회 일각에서 미일동맹이 강화되는 것을 우려하며, ‘태프트-카스라 밀약’ (Taft-Katsura Secret Agreement)의 악몽을 떠 올리는 이들이 있다. 지금부터 정확히 110년 전에 있었던 이 밀약에서 미국과 일본은 아시아에서 자신들의 거점 지역을 서로 나눠가지기로 합의하였다. 각서 (memorandum) 형태의 이 합의에서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열강에 의한 제국주의 정책이 세계의 판을 결정하던 이 시기에 이러한 약속은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특이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의 세계관에서 이러한 강대국의 세력균형 방식은 용인되지도 않고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다.
식민지 정책이 다시 부활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기 어렵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 강대국의 영향력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북한은 동맹국 중국과 대등한 입장에 놓여있지 않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북한은 중국의 영향력 아래 거의 종속된 상태에 놓여있다.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는 엄연한 독립국가지만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강대국이 중소국의 영토를 병합할 수는 없지만 정치적 경제적으로 영향권역으로 묶어두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다면 미·일동맹이 강화되면서 피로에 누적된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일본 역량에 맡기고 미국은 아시아 해상통로 (sea lanes)를 전담 마크하면서 중국을 봉쇄하는 역할 분담을 밀약으로 합의한다면 한국의 입지는 큰 난관에 처하게 된다. 일본의 군사 활동 영역이 확대될수록 미국의 한국방위 의지는 약화되고, 이렇게 되면 한국은 결코 원치 않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일본과 군사협력을 강화해야 하고, 중국과의 파트너십은 곤경에 빠지게 된다.
더 중대한 문제는 따로 있다. 세계질서와 한반도 안보의 연계성 문제이다. 6.25 전쟁이 일어난 것은 그 당시 세계질서 구도로 형성되던 ‘냉전’ (Cold War)의 여파 와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던 구소련이 아시아에서 중국과 북한을 영향권으로 병합했고,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일본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봉쇄전략을 구사하던 와중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지하고 지금 수준의 미군을 주둔시켰어야 했는데, 한국지역에 힘의 공백상태를 만들어 놓은 결과 북한 측이 공격을 개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새롭게 형성되는 아시아 ‘판’의 구도는 미국과 중국의 양극이 대치하는 국면으로 가고자 한다.
세력균형 판세로 볼 때 미국이 아시아에서 중국을 봉쇄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므로 일본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과 일본의 군사력 제휴는 중국 시각으로 볼 때 너무 위협적이라고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첨단 군사력의 연합이라는 측면에서 중국에게는 큰 위협으로 비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북한 지역의 전략적 중요도를 높게 평가할 것이고, 이것은 결국 한반도를 중무장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한반도가 화약고로 변모된다는 뜻이다.
중국과 미일동맹이 아시아 지역에서 전면전쟁을 벌일 가능성은 대체로 낮다. 핵전쟁을 불사하는 무모한 전쟁을 벌여 취해야 할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동아시아 지역에 산재해 있는 지역분쟁에서 서로 힘겨루기를 벌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중국과 일본이 맞서고 있는 조어도가 가장 위험한 곳으로 지목된다. 그리고 한반도 역시 분쟁 위험 수위가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과 미일동맹이 서로 대치한다면 그 대치의 강도가 제일 예민하게 느껴지는 곳이 한반도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북한으로 하여금 군사도발을 일으키도록 조장하지는 않겠지만 북한 스스로가 중국의 관심과 지원을 유도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도발을 감행할 수 있다. 북한의 선제 도발로 한미일 군사 대응체제가 강화되면 중국의 대북한 지원은 불가피해진다. 이것 말고도 북한은 스스로 위기를 조장해야 체제가 유지되는 기형적 국가이다. 대외적으로 위기상황이 조성되지 않으면 국가 내부의 정치 통합력이 약화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미일동맹이 강화되는 것을 가장 반기는 나라가 북한이라고 본다.
그동안 소원해진 북·중관계도 회복될 것이고, 내부의 체제위기도 해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으로서는 이 부분이 가장 우려스런 대목이다. 북한의 도발 유혹에 맞서야 하고, 극단적으로는 제한전쟁 상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이 북한을 상대로 할 때 큰 지렛대가 되어주었던 당근책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기 어려워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 볼 대목이 있다. 1960년대 말 미국이 중국의 문을 처음 두드리면서 외교 정상화를 추진할 때, 남북한은 서로 유사한 내부 정치개혁을 동시에 시도하였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 강도를 약화시켰고, 중국은 그동안 적대 국가였던 미국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면서 북한을 실망시켰던 것이다.
이에 맞서 한국은 소위 ‘유신체제’를 구축하였고, 북한도 김일성을 국가주석 자리에 올리는 헌법 개정을 꾀했다. 남북한 양측은 자신의 동맹국이 보여준 실망스런 태도에 맞서 국내적으로 권력을 더 집중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군사적 대치가 구조적으로 정착되면 남북한 역시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방편으로 국가 내부의 정치개혁을 꾀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시도는 민주주의의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고 본다. 남북한 양국의 군사력이 더 강해지고, 안보 지상주의가 국가 전반에 퍼지는 그러한 방향일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 안보는 물론 남북한 양국의 국가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아시아 정세 구도와 한국의 선택!
미·일 동맹이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판세 역시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지역안보의 안정판이 깨질 위험이 더 높다고 관측된다. 미국으로서는 중국의 팽창이 걱정되므로 이것을 봉쇄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겠지만, 그러한 봉쇄조치와 활동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법이고 부작용도 예상된다. 미국 입장에서는 그러한 부작용의 여파가 일종의 관리 문제로 간주될 것이다. 하지만 중소국 대만과 남북한, 그리고 동남아 국가들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들 국가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면서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양극 대결구도에서 어떤 쪽에 서야 하느냐가 가장 큰 딜레마이고, 방향이 선택되었다고 하더라도 강대국 대결구도에서 때로는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희생과 부작용이 파급될지는 앞으로 펼쳐질 강대국의 역학관계 여하에 달려있다.
① 엄격한 양극 대결체제; 중국과 미일동맹이 팽팽하게 대치하는 구도이다. 이런 상황을 전제로 한다면 한국의 선택은 미일동맹에 가담하여 한 축을 담당해야 한다. 중국은 러시아와 힘을 합칠 것이고 북한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할 것이다. 남북한 관계는 대치상태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② 중국 우위의 구도; 미일동맹이 힘의 한계를 노출하는 상황이다. 미일동맹이 강화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이 올인 전략을 펼쳐 힘을 압도하는 것이다.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중국이 미국과 협상전략을 펼치고, 필요하다면 한국을 끌어들여 일본의 기세를 꺾는 구도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이중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지금처럼 중국과의 파트너십을 강화하고, 일본의 군사역할이 확대되지 않도록 공동보조를 취할 필요도 있다.
③ 미·일동맹이 중국을 압도하는 구도; 일본의 군사력이 급속히 강화되고 미국 역시 아시아 주둔 군사력을 강화하여 중국을 봉쇄하는데 성공한다면 중국의 동아시아 패권 지위는 크게 약화된다. 이 구도에서 한국의 선택은 미·일동맹에 가담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은 일본의 외교 역량에 압도된다는 부작용이 따른다.
④ 중국과 일본의 대결 구도; 미국이 일본을 이끌어 내고 동아시아에서의 역할 부담을 크게 완화시키는 형국이다. 세계 전역에서 미국이 안보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퇴조의 길을 걷게 되면 중국과 일본의 직접 대결 구도가 형성된다. 이 구도가 한국으로서는 가장 크게 우려해야 할 시나리오이다. 과거 한반도를 둘러싸고 열강이 각축을 벌이던 시기의 구도와 유사하다. 한미동맹은 약화되어 한국은 선택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가장 예민하면서도 큰 난관이 예상되는 구도이다.
⑤ 미국이 패권을 차지하는 구도; 미국이 일시적으로 일본을 이끌어 내지만 궁극적으로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패권적 지위에 오르는 구도이다. 일본의 군사적 역할은 크게 제한되며 어디까지나 보조적 역할에 머문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 대만, 괌을 연하는 선에서 강력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해상 교통로를 석권하여 중국을 봉쇄하는데 성공하고 아시아에서 패권 지위를 얻는다. 이 구도가 한국으로서는 가장 유리한 시나리오라고 평가된다. 한국의 선택은 비교적 명확해지고, 필요에 따라 중국, 일본과 선택적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일동맹은 언젠가는 변화를 겪어야 할 처지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질곡이 그대로 담긴 미·일관계가 그대로 유지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대는 많이 변했고, 그 변화에 부응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일본 내에서 극우세력이 급속히 준동하는 움직임은 변화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늦었기 때문일 수 있다.
한국으로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결코 반길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움직임에 정면으로 도전할 힘도 없다. 이것이 냉철한 국제정치의 흐름이고 또 원리이다. 그러나 미래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국이 큰 힘을 발휘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하고, 작은 힘이라도 여러 번 반복하여 발휘한다면 뭔가를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미국이 일본의 군사 역할을 확장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지금 한국이 해야 할 일은 일본의 역할을 최소화시켜 동아시아에서 긴장이 완화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목표를 향해 가진 외교 역량을 모두 발휘해야 한다. 1954년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이 아시아 지역 8개국을 묶어 ‘아시아반공연맹’을 창설하는 외교력을 펼친 것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지금보다 더 절박하고 더 허약한 상태에서도 당시의 세계 기류를 읽어내고 외교 역량을 발휘한 것에 주목하자. 지금의 대한민국 역량으로 볼 때 적어도 아시아 지역에서는 힘 있는 목소리와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무기력한 자세로 화려한 담론으로만 흘러가는 기류에 편승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본다.
< 이 민 룡 (李珉龍)소장 약력 >
정치학 박사
숙명여대 안보학연구소장
(사) 한국국방정책학회 부회장
한국국제정치학회 명예이사
민주평통 상임위원 (안보국제분과 간사 역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자문위원 역임 (2012-2013.2)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장 역임
육군사관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미국 University of Maryland at College Park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