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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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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10월 유신’에 무너진 소련과 공산주의

자주국방과 중화학공업 육성위해 '10월 유신' 단행, ‘무너진 공산주의자들의 꿈’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해 유신헌법을 발표하고 1972년 12월 27일 국민투표에서 이 ‘유신헌법’은 정식으로 채택된다.

이에 대해서 자칭 ‘민주화 인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독재자’라고 비판을 한다. 그렇다면 왜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적으로 욕을 먹을 줄 알면서도 무리수를 두었을까?

군인이었던 박정희는 1949년 남로당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는 조사 과정에서 남로당 조직을 수사팀에 알려 주는 등 군에 침투해 있었던 남로당 조직책들을 소탕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사면된다. 그 이후 군복을 벗고 일반인으로 생활을 하던 인간 박정희는 한국전이 발발하면서 국군으로 복귀되어 한국전에 참전하게 된다.

1960년대 초반 대한민국은 처절한 빈곤 국가였고 국가예산 중 무려 52%가 미국의 원조로 충당되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 곳곳에는 강도와 절도가 끊이질 않았으나 치안은 무기력하였으며, 농민, 노동자, 교사, 공무원, 상인, 예술인, 기업인들은 모두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장면 정부의 역량으로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으며, 자유민주적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젊고 혁신적인 지도자를 갈망했다. ( 출처 : 10월 유신과 국제정치 -이춘근 저)

함석헌 선생은 당시에 유행했던 잡지 ‘사상계’에 “또다시 혁명해야지. 혁명밖에 다른 길이 없다. 뱃속에 병이 들었으면...하다가 죽는대도 배를 가르고 수술해야지 그 길밖에 없다.“라고 쓸 정도로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고 있었다. 당시 장준하 선생  같은 지식인들은 5.16이 터졌을 때 쌍수를 들고 군인들의 혁명을 환영했다. (출처 : 박정희 정신 2018. 10-12, '박정희는 사농공상의 나라에서 어떻게 과학기술을 일으켰나?' 김용삼 저)


북한의 남침으로 군인이 된 박정희, 북한의 위협 때문에 ‘10월 유신’ 단행

1968년 1월 13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의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내려왔다가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신조가 생포되고 그 다음 날인 1968년 1월 23일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함이 동해에서 정보활동을 하다가 북한 해군에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북한의 무장공비 120명이 울진·삼척지역으로 침투하여 우리 주민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69년 4월 15일에는 미 해군의 정찰기 EC-121 워닝스타(Warning Star)가 북한 공군에 의해 납치되었다.

1968년 1월 30일 베트남에서 베트콩과 월맹군의 대규모 공세가 있었다. 이에 미국은 매우 곤혹스러워 했는데, 이런 사실을 인지한 북한은 미국이 아시아에서 2개의 전쟁을 수행할 역량이 없음을 간파하고 1968년 1월 13일부터 1969년 4월 15일까지 남한지역에 다양한 공작을 시행한 것이었다.

아시아지역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미국은 결국 1969년 7월 25일에 “방위의 1차적인 책임은 자국이 담당해야 한다. 미국은 아시아 대륙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닉슨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을 철수하겠다고 한국 정부에 통보하였다.


한국과 미국 정부는 아래의 사항에 합의를 한다.

첫째, 1971년 7월 말까지 7사단을 중심으로 주한미군 1만 8,000명을 철수시키고, 서부전선의 2사단을 후방에 배치시키며, 휴전선 방어는 한국군이 전담한다. 

둘째, 미국은 15억 달러의 군사원조 및 군사차관을 제공하여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을 지원한다. 

셋째, 양국의 외무, 국방 고위관리가 참석하는 연례안보협의회(SCM)를 개최한다. 

주한미군 제7 사단은 1971년 3월 27일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고별행사를 치른 후 한국을 떠났다. 이로써 주한미군 병력은 6만 3,000명에서 4만 3,000명으로 감축되었다. 이런 위기 감속에서 박정희 정부는 1970년 정래혁 국방부 장관 당시 국방과학연구소와 민간연구소(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 백영훈)에 의뢰하여 ‘방위산업 10개년 계획’을 작성했다.

또 1970년 7월에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바텔 연구소의 해리 최 박사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이경서 박사로부터 ‘기계공업육성방안’을 보고 받고는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그대로 추진하도록 지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경제기획원은 기계공업을 육성하기 위해서 주물선(鑄物銑)공장, 특수강공장, 중기계공장, 조선소의 ‘4대 핵(core) 공장’을 전략적 우선사업으로 정하고 추진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와 동시에 1970년 12월 31일에는 각 군에 흩어져 있던 병기 개발 지원시설 및 인력을 한 곳으로 모으는 ‘국방과학연구소법’을 제정·공포 하였다. 

그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11월 9일 경제기획원에서 방위산업 건설(4대 핵공장 건설) 추진 현황을 보고 받은 그날 김정렴 비서실장을 통해 즉시 국산 병기 개발에 착수할 것을 지시하면서 1차 시제품을 1971년 12월 30일까지 제작하고 결함을 보완하여 2차 시제품을 1972년 3월 1일까지 개발하도록 기한을 정했다. 이후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들은 설계실을 청와대에 차려 놓고 연구 개발을 하여 1971년 12월 16일 M-1 소총, 카빈 소총, 기관총, 박격포, 수류탄, 지뢰, 3.5인치 로켓발사기, 신형 로켓발사기, 포탄류, 개인 장구류 등을 생산해 내었다. 이것이 1차 ‘번개사업’인 것이다. 

그 이후, 전차, 자주포, 함정, 항공기 등을 생산하기 위해서 중화학공업에 투자를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10년 이상의 시간과 10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이 소요된다는 것을 보고 받고 1971년 10월 17일 ‘10월 유신’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10월 유신’에 결국 무너진 소련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위해서 조선산업, 화학산업, 전자산업, 철강산업, 자동차산업 등에 대규모 투자를 하였다. 그리고 공장에 공업용수와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서 전국에 다목적 댐을 건설하였고, 시골의 유휴인력을 기술 인력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 전국에 공업계 고등학교를 건설하였다. 또 후방에서 생산된 무기들을 전방으로 보내기 위해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였으며, 이를 부산항과 연결하여 일반 생필품들을 해외로 수출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또 일본 히타치 중공업을 모방하여 창원공단을 건설하고 각종 무기들과 공산품들을 생산하게 하였다.

이렇게 투자된 것들이 1980년대 저금리, 저환율, 저유가 시대를 만나면서 한국 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결국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게 된다. 이에 충격을 받은 동구권들은 소련에서 떨어져 나와서 미국의 편에 서게 되었고, 결국 1922년 12월 30일 설립되었던 소련은 1991년 12월 26일 폐망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남로당 사건에 휘말린 이후 야인으로 생을 마감할 뻔 했던 인간 박정희는 북한의 남침으로 군인으로 복귀하였고, 쿠테타 세력의 거두가 되어 한반도에서 공산세력의 남하를 저지하게 된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을 저지하기 위해서 중화학공업에 투자를 하고 이를 완수하기 위해서 ‘10월 유신’을 단행하게 되는데, 그 결과로 결국 공산주의의 본고장인 소련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훗날 자칭 ‘민주화 인사’라고 주장을 하면서 북한에 90도 인사를 하던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10월’ 유신‘을 비판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독재자’라고 비판을 하지만, 정작 ‘대중경제론’을 설파하면서 농업사회로 복귀하자고 주장했던 정치인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면서 방해했었던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은 일절하지 하지 않고 있다. 이들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다양한 명목으로 자금을 지원하였으나 국민적 비판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으며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다. 

역사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을 한 사람들은 적폐로 몰려 감옥에 가고, 역사를 퇴보시킨 사람들은 민주화 인사로 추앙받으며 국민묘지에 편히 쉬고 있으니 이런 것을 두고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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