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 옐친 시대의 ‘경제적 대학살’을 아십니까. 영국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리드가 사용한 이 표현은 스탈린 시대 1930-1950년대에 정치적 대숙청에 의한 사망자가 1천만명에 이른 것에 이 시대상을 빗댄 것이다. 즉, 1991-1994년 시기 ‘충격요법’에 의한 급진적 경제개혁의 여파로 인한 음주, 흡연, 사고, 의료의 질 하락 및 빈곤으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등으로 사망자가 350만 명에 이르렀던 신생 러시아가 겪은 참혹한 현실을 대변하는 용어다.
우리는 왜 지금 여기에서 약 30년전 붕괴한 소비에트와 그로부터 독립한 러시아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논의하고 있는가.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그레이트 게임'이란 개념이 있었다. 영국과 러시아의 패권전쟁과 관련된 것이었다. 남하하려는 러시아와 막으려는 영국의 갈등과 분쟁이었다. 결과는 영국 승리.
지금 그레이트 게임은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을까. 최근
빅 이슈메이커로 부상하고 있는 국제관계학 전문가 김정민 박사에 의하면, 이것은 현재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시장경제 요소를 받아들인 채 사회주의를 계속하겠다는 중국과 자유민주
질서 속 시장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미국의 패권경쟁이 모든 세계 분쟁과 갈등의 기저에 놓여있다는 분석이다.
현대사의 빅 매치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 사회주의 진영의 74년에 걸친 체제경쟁이었다. 소련의 붕괴와 그를 이은 러시아의 현실은
미국의 승리를 웅변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는 듯하다.
그러면 향후 미국과 중국의 빅매치에서 승자는 누구일까. 이 패권 싸움은 미국의 주도권 하에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주장하는 김정민 박사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지렛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북한이라고 말한다. 북한의 운명은 미국이 중국을 어떻게 처리하고 컨트롤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차피 북한체제는 시한부 운명이라는 의미다.
이에 우리는 북한이 세계질서에 평화롭고 안전한 방식으로 편입되지 않으면, 그 미래는 과거 소비에트나 머지 않은 미래에 중국이 맞이하게 될 최후와 궤를 같이하는 운명일 것이라는 전망을
하면서, 과거 소비에트가 걸어온 길과 러시아가 경험하는 현재를 스크리닝하고 있다. 사회주의 혹은 그의 미래지향점이라는 공산사회란 허상이거나 허구이거나 사기일 뿐. 따라서 거짓은 언젠가는 무너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이 기획특집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급진개혁주의자 옐친은 민주주의의 영웅으로서 화려하게 러시아 초대 대통령에 등극했다. 그러나 그는 급진개혁이 가져올 충격과 파장이 얼마나 국민대중에게 위험하고 가혹한 것인지를 가늠하는데 실패했다. ‘충격요법’이라는 말로 인내를 요구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차이가 컸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내건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무상체제에 길든 사람들은 혹한에 길거리로 내몰린 심정으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마주해야
했다. 철저히 타성에 물든 부패한 관료주의의 정치와 행정은 급속한 지지세력 이탈과 민심이반으로 귀결되었다.
러시아적 정신세계와 전통 속에서 정치지도자에 대한 신뢰는 부패한 측근세력에 의해 추락에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었다. 소위 ‘옐친 패밀리’의 악명은 ‘금준미주 천인혈, 옥반가효
만성고, 촉루낙시 민루락, 가성고처 원성고(金樽美酒千人血 玉盤嘉肴萬姓膏 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라는 동서고금의 진리를 적나나하게 되풀이했다. 옐친 딸 타티아나가 막후실세이니
어쩌고, 사위 디야첸코의 탈세가 저쩌고 하는 소문들은 당시 러시아인들의 밥상머리에서 가장 널리 회자되는
가십거리였다.
일그러져가는 영웅의 이미지를 밝게 전환시키고자 한 의도였는지, 아니면 술취해 비틀거리는 대통령답지 못한 모습을 조명하고자 했는지 원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옐친이 1996년 대선을 앞두고 로스토프 시의 록콘서트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 러시아 출신 AP통신 소속 사진기자 알렉산드르 제믈랴니첸코에 의해 촬영되어 세상에 뿌려졌다.
제믈랴니첸코는 1997년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 기자가 이미 92년에도 8월 쿠테타를 찍은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기자라는 점에서 긍정적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의도적 노출이었을 거란
추측도 있지만, 취중 실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세상은 결과로 말하기 마련이다. 언론의 일방
적 프로파간다와 옹호로 재선에 가까스로 성공했지만, 옐친의 이미지는 치명적 추락의 길로 들어섰다.
위대한 러시아의 대통령 위신을 실추시켰다는 비판이 지배적이었다.
국민대중들의 대 옐친 감정은 악화일로였다. 옐친 패밀리의 부패는 국민들의 상실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자본주의를
모르는 그 당시, 국유재산의 민영화를 통해 국민들에게 배포되었던 주식,
바우처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을까. 또 알더라도 가난해서 당장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종이조각에 불과하다고 유혹해 헐값에 매입해 돈방석에 오른 졸부 신흥 루스끼들과 권력과 정보를 가진 특권층들에게 국민들이 느끼는 배신감이
얼마나 컸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위한 특수학교, 우수한
시설을 갖춘 폐쇄적인 병원, 호화로운 사유지와 별장을 소유했다. 이런
것들로 인한 불만의 축적은 옐친의 퇴임 후 안위를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옐친에 대한 기대와 지지는 바닥을 쳤고, 체첸과의 전쟁으로 여론은 악화되기만 했다. 경제개혁은 살인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건강에도 문제가 있어 1년에 두번이나 심장마비가
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선을 위해 정부지출을 늘려 경기부양책을 쓰고, 징집제도 폐지를 공약하는 등 포퓰리즘을 펼쳤다. 그 공약들은 재선
성공 후 한달 만에 폐기되었다.
옐친이 임기 말 2년간 5명의 총리를 교체하면서 자신의 퇴임 후 안전을 보장해줄 후계자를 물색하는 동안 정치적 혼란과 러시아의 약화는 심화됐다. 결국 그 옥쇄는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KGB출신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때 옐친 측에서는 퇴임 후 절대 기소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푸틴에게서 받아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소비에트 붕괴 10년간인
옐친 시대는 비관주의, 무기력감, 미래에 대한 절망, 도덕적 해이, 냉소주의 및 박탈감으로 긴장이 팽배했고, 책임질 희생양은 결국 옐친 자신이었다. 옐친은 최대한 아름답고 극적인
자의적 퇴장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새천년과 과거의 부패무능은 양립할 수 없다는 여론이었다.
2000년 1월1일자로 대통령 권한대행 업무를 맡은 푸틴은 즉시 지지부진한 체첸의 전장으로 전투기를 타고 날아갔다. 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위한 상징적 제스처였다. 국민들은 늙고 병든 옐친이 아닌 젊고 강력한 새 지도자에게 기대를 걸었다. 푸틴의 지지도는 임기 내내 70%대를 유지했다. 조작이라는 반론도 이었지만, 임기 초기에는 사실 인기가 높아 진위를 밝히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민영화되었던 일부 국가재산에 대한 국유화가 추진되었다. 국민들의 상실감을 회복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러자 서방에서는
사회주의로의 회귀가 아닌가 하는 의혹과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내부에서는 옐친 패밀리가
독점하던 국부의 일부가 새로운 권력자 푸틴과 측근에게 넘어가는 과정이었을 뿐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돌아온 것은 없다는 비판이었다. ‘페테르부르크(약칭 피테르) 마피아’라는 개념은 이들 푸틴 신권력과 관련된 조직들을 말한다.
푸틴에게는 행운이 따른 것일 수도 있지만, 소련 붕괴는 중국으로 하여금 자발적 개혁으로 자본주의적 요소를 일부 도입하면서 경제규모를 키우게 했고, 미국으로서는 소련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키운 중국의 과도한 성장이 이젠 부담이 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국제 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오일 머니는 죽어가는 러시아
경제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인들의 평균 임금이 오르기 시작해 옐친 시대보다 약 3배 가까이 상승하면서 생활도 안정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임금수준이 1200달러에 이르렀다. “러시아는
옛 동구권 경제를 이끄는 폭주기관차다”. 2005년 당시 세계은행 보고서는 이같이 표현했다. 1999년 3천만명이던 절대 빈곤층도 2002년에는 1천3백만으로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2005년 10월 러시아 주가지수는 전년보다 70%이상으로
세계 1위의 상승률을 보였다. 외환보유액도 1600억 달러로 세계 5위에 올랐다. 사우디에 이어 세계 2위의 원유수출국인 러시아의 대표 수출품 우랄
원유의 가격은 2004년 27달러에서 2005년에는 61달러로 올랐다. 최근 7년간의 경제성장률이 7%였다고 푸틴 자신이 자랑할 정도였다.
“인프라 확충을 위한 투자기금을 설치하고 빈곤층을 위한 의료시설 확충과 교사 및 공무원 임금 인상을 위해 4조 2700억 루블 (약 170조원)을 쓰겠다” 푸틴의 공약이었다. 강한 러시아의 부활 플랜이 본격시동을 거는 것으로 보였다.
2008년 7월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러시아 해군 사령관은 “가까운 미래에 항공모함 5-6척을 건조할 것이며, 2012년 이후에는 북해 및 태평양 함대에 배치할 것”이며 “보레이급 핵잠수함의 성능을 최첨단으로 현대화시킬 것이며, 올해 말까지
보레이급 핵잠수함 3척이 완성되는데 네 번째 잠수함부터 적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푸틴이 대통령이 된 2000년 8월 러시아 최첨단 핵잠수함 쿠르스크호가 바렌츠해에서 침몰해 118명의 장병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뒤 심하게 위축됐던 러시아 군의 부활을 상징하는 몸짓이기도 했다. 이러한 ‘위대한 러시아 재건’의 꿈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2008년 미국은 체코와 동유럽 MD 기지 건설 협정에 서명했다. 이즈베스티야는 ‘러시아가 쿠바에 핵 폭격기를 배치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어쨌든 러시아도 이에 맞서,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10억 달러 무기 거래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푸틴의 무소불위의 힘은 8년 연임 후 자신의 심복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놓고 자신이 4년간 실세 총리직에 있다가 2012년 대통령직에 복귀하는 것으로 발휘되었다. 러시아 황제
'차르의
탄생'이라는 비아냥 아닌 비아냥을 들으며, 그는 6년 임기의 대통령 3기를
마무리하고, 이제 4기 대선을 준비하고 있다. 러시아식 민주주의의 실체는 무엇인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물론 이미 푸틴은 여전히 대안부재 속 50%대의 인기를 누리고 있으나, 취임 초 70%대에 비하면 그에 대한 기대나 신선감은 크게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2014년 크림반도 점령 후 미국 등 서방의 경제제재로 인한 경제붕괴가 가장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또하나, 2000년대
초반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 발 위협 요소가 커지는 상황에서 미국은 2001년 9월11일 세계무역센터 테러를 당하는 위기에 처한다. 부시 행정부는 러시아를 자기 편으로 만들어 중국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를
위해 국제 유가를 올려 러시아를 지원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그 임계점이 푸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공격으로 나타나자 다시 제재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결국, 세계 질서는
미국의 패권 전략 속에 있다는 김정민 박사의 일침은 향후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 북한의 미래를 예측하고 전망하는데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끝으로, 그의 주장을
인용한다. 지정학적 요소는 어떤 의지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약소국의
운명이 될 수도 있고, 강대국으로 가는 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를 위해 통일은 불가피하고, 이는 현재 미국의 패권 전략과 이해를 같이하는 타이밍에 있다. 우리는 한미동맹을 이용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지금 한국 집권세력은
이를 보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고민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언론대학 방송학 박사 수료
주요경력
-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대학 한국어과 강사
- '러시아의 소리' 한국어 방송부 아나운서
- KBS 라디오 방송작가
- KBS 모스크바 통신원
-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부 모스크바 통신원(필명 정여경으로 활동)
- 뉴스타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