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희 글로벌디펜스뉴스 편집위원(러시아 전문)
‘그 동안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 땅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모델은 실패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1991년 9월6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한 선언이 이러했다.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공산당 서기장이면서 소련의 최초이자 최후의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 그의 동지였다가 이후 최대 정적이 된 보리스 옐친 러시아 공화국 최초 대통령은
그보다 한술 더 떴다. ‘우리 땅에서 그런 실험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 국민들에게 큰 비극이었다’.
그해 12월 25일,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에서 고르바초프가 사임하면서 소련기가 내려지고 러시아 삼색기가 게양된다. 19세기에 태동해 20세기를 지배하고, 지상 최대의 영토를 풍미했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종언을 고하는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사회주의 국가. 지상낙원이라는 간판을 내건, 그러나 황무지 위의 폐허. 그것이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한 유토피아
공산사회로 가는 중간지점인 사회주의 체제의 실체이자 종착역이었다.
그리고 2018년 1월.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냉전의 최전선이자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강력한 보루였던 대한민국은 현재 목적지를 잃은 채 표류하고 있다. 미중 대결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중국과 핵미사일 도발로 미국을 자극하는 북한으로 인해 어느 때보다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이 고조된 상황에서 현 한국 정치계는 왜 이런 퇴행적 행동을 하고 있는가. 최근 나온 정부 여당 주도의 개헌안에서 ‘자유민주’라는 표현이 실종되어 충격을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회민주주의나 인민민주주의에 맞서는 자유민주주의 개념이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시대착오가 나타나는가.
다시 1991년 7월로 거슬러올라가 보자. 필자는 91년 유학을 목적으로, 1990년 10월 한국과 수교를 한 USSR(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의 수도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소련의 관문인 쉐레메체보 국제공항의 을씨년스런 풍경은 그러나 지상낙원의 흔적조차 없었다. 패망한 폐허이자 몰락한 흉가. 빛바랜 카키색 제복을 입은 남녀들의 무뚝뚝함과 경계심과 심드렁함이 교차되는 다소 험악스런 표정이 사회주의 소련의 첫인상이었다.
늦어지는 입국수속의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고개를 들어 쳐다본 천정은 보기에도 딱했다. 조명을 위한 전구들은 곳곳이 꺼져 있어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우스꽝스러웠다. 볼일이 급해서 들어간 화장실은 대략난감이었다. 어떻게 급한 일을 해결해야 할 지 그 당혹감은 경험해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변기 커버가 없어 앉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이후 시내에서 본 모든 화장실의 형편은 천편일률적으로 쉐레메체보 국제공항의 그것과 닮은 꼴이었다. 이것이 미국과 함께 세계를 지배해온 초강국 소련의 실체였나. 의구심과 회의를 동시에 일으키기에 충분한 쇠약증과 초라함이었다.
훗날 알게 된, 대학시절 스스로를 북한 노동당원보다 더한 빨갱이였다고
말하는 학생운동권 출신 인사가 사상의 조국 소련을 찾아 유학을 왔다가, 그 실상에 실망하고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우파 신봉자로 전향했다는 고백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상사회로서 공산주의 사회의 현실을 보고자하는 꿈을 안고온 순진한 젊은 유학도들의
뒤통수를 인정사정 없이 후려치는 일말의 배신일 수 있었다. 바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의 살풍경한 현실이었다.
쉐레메체보의 첫인상은 인상의 오류로 끝나지 않았다. 모스크바 시내 상점들의 텅텅 빈 진열대와 삭막하고 시름 어린 소련인들의 표정은 빈곤이 주는 고뇌의 깊은 한숨이었다. 그것은 사회주의 모스크바를 찾아온 동양의 이방인들조차 감지할 수 있는 묘한 긴장감과 위기감을 분출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꽉 누르면 빵 터질 듯 팽배한 분노와 절망으로 일그러진 얼굴들. 그것은 또하나의 혁명의 징후처럼 보였다.
물론, 일말의 위안인지 변명인지 모를 이야기들도 간혹 들렸다. 길거리의 상점은 텅 비었지만, 그들의 아파트에는 생필품들이 잔뜩 비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물건이 언제 또 나올 지 몰라, 보이면 사재기를 해서 쟁여놓은 바람에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또다른 낙관론도 펼쳐지곤 했다. 소련인들에게는 주택 외에 ‘다차’라고 불리는 별장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곳에서 주말마다 휴식하면서 자기가 먹을 채소나 과일들을 경작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보다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심찮게 들려오는 사회주의 옹호론이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은 부분이면서 전체였고, 전체이면서 부분이었다. 불완전하면서 완전한 설명이었고, 동시에 완전하면서 불완전한 해명이었다.
다시 우리의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고르바초프가 직접 ‘제2의 호흡’이라고 언급한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는 '다시 짓다', '재건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다. 사회주의의 재건을 역설한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왜 나와야 했을까. 1964년-1982년까지 브레즈네프 집권기는 안정의 시기라고도 하나, 일반적으로 침체와 정체의 시대로 평가된다.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스탈린의 사회주의 성공 신화 이면에 숨은, 숙청이라는 암울한 역사에 대해 재평가하면서 스탈린 격하를 통해 자신의 권력 강화를 추구했던 후르시초프. 서방과의 평화공존으로 해빙을 가져왔지만 농업개혁을 통한 경제성장을 추구한 후르시초프는 그 실패로 일찍 실각한다. 그리고 후임자 브레즈네프 통치 18년간의 안정은 1971년의 ‘발달한 사회주의’를 선언한다.
브레즈네프 시대는 미국과의 핵균형을 통한 군사적 데탕트
외교로 세계에 긴장완화는 가져왔으나, 내부적으로는 오히려 사회주의의 도덕성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정체와
부패라는 고질병을 잉태하는 모럴 헤저드를 초래했다. 결과적으로 소련의 폐쇄된 관료제에 의해 왜곡된 사회주의가
인류의 이상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 시간이었던 셈이다.
폐쇄적인 관료체제는 이런 위기를 은폐하기에 바빴다. 생산량과 경제수치의 조작이 일상화되었다. 힘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지하경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국가재산이 빼돌려져 암거래됐고, 서방에서 밀수입한 상품들이 지하에서 고가로 암거래되었다.
당이 가지고 있던 유망인사들의 리스트를 일컫던 '노멘클라투라'가 '특권층'이라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계급과 착취 없는 공산주의 사회를 지향한다던 사회주의 체제에서 일부 계층이 누리는 특권과
특혜는 일반 인민대중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평등을 외치던 그들 사회주의 소비에트 사회에 특권층과
인민대중과의 괴리가 노정되기 시작했다.
또한, 잠재적으로 소련 붕괴의 내재적 원인이 된 민족 문제도 있었다. 소련 15개 공화국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위성국가들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민족주의를 등에 업고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른바 ‘프라하의 봄’으로 명명된 68년 체코 민주화 사태에 대해 브레즈네프 독트린, 즉 ‘사회주의의 성과 수호는 모든 사회주의 국가에게 부여된 국제적인 의무’라는 입장을 내세운 소련이 바르샤바 조약군을 투입해 무력진압하자,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과 서유럽 공산당들까지도 소련을 비난하고 나섰다.
특히 중국은 소련에 대해 ‘사회제국주의’라는 표현으로 격하게 비난하면서 중소 국경분쟁으로까지 비화됐다. 중국은
‘세계인민의 적’이라던 미국에는 접근하면서 사회주의 형제국가인
소련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다.
그것조차 끝이 아니었다. 설상가상.
70년대 미 중 일의 제휴에 압박을 느낀 소련은 80년 아프가니스탄 및 베트남과 군사동맹을
강화한다. 79년 반혁명 게릴라 세력에 시달리던 아프가니스탄의 친소련 정부가 요청하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군사적 개입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소련이 붕괴의 늪에 빠지는 단초가 되었다.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 등 공산당 서기장들의 잇단 조기 사망은 소련의 몰락을 재촉하는 듯, 혹은 상징하는 듯했다. 마침내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취임연설에서 고질적 정체를 탈출하기 위한 글라스노스치(гластность : 개방, 정보공개, 언론자유)를 주창한다.
세계인의 이목이 소련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는 레이건 미 대통령과 미소관계 개선을 위한 정상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1986년 4월 드디어 그는 ‘사회생활
전 부문에 걸쳐 페레스트로이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무렵 일어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페레스트로이카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세계적으로 인식시켰다.
87년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병폐로서 원재료의 낭비와 비효율성, 신기술의 도입지연, 중앙집중관리의 경직성을 언급했다. 또 소련에 건설된 특수한 형태의 사회주의의 결함, 특히 경제관리의 과도한 중앙집중, 인간 이해의 다양성 무시 등이 위기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의 목적은 ‘사회주의를 강화시키는 것이며 이것을
다른 체제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경제개혁을
통해 경제적 민주화, 시장요소의 더많은 도입을 추구했다. 즉
민주적 사회주의였다. 그러나 기업이나 국유재산의 사유화는 계획하고 있지 않았다.
글라스노스치가 결국 페레스트로이카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이는 언론매체들을 통해 그동안 금기시 됐던 정보들을 공개하고 토론과 논쟁을 통해 대중들의 창의성을 고양하고 개혁의 원동력으로 삼아 사회주의적 다원성을 실현하고자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급진주의를 고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대표 사례가 보리스 옐친의 등장과 급성장이었다. 이 시기는 고르바초프를 중심으로한 개혁주도파, 리가초프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사회주의 보수파, 그리고 옐친으로 대표되는 급진개혁파들의 공존기였다. 이들은 소련의 위기와 개혁의 필요성 및 관료주의 타파와 민주화 진전이라는 방향성에 대해 공감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더 많은 공개,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사회주의’와 뜻을 같이했다.
그러나 87년 당 중앙위원회에서 개혁의 속도에 대해 옐친이 특히 리가초프를 비판하면서 보수와 개혁 세력 간에 보혁 논쟁의 서막이 올랐다. 그러나 당시 지지세력이 약했던 옐친은 11월 11일 모스크바 시당 서기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후에는 정치국 후보위원직에서도 물러났다.
그러나 이 사실이 소련
매체가 아닌 서방의 매체를 통해 알려지면서 급진개혁파들에게 보수에 대한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소련
공산당 보수파들은 이에 페레스트로이카 자체에 대한 우려를 갖기 시작했다. 1988년 3월 안드레예바는 스탈린의 공적과 사회주의 전통을 옹호하고 과도한 페레스트로이카를 공격하는 논문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를 ‘소베츠카야
러시야’ 지에 발표한다.
이에 대해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 편집부를 통해 ‘페레스트로이카의 원칙은 사고와 행동의 혁명성이다’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거기서 그는 ‘원칙을 방기하거나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는 비판은 페레스트로이카에
제동을 걸려는 행동이라고 반박했다. 이것이 대중의 지지를 얻었고, 보수파가
후퇴하면서 개혁주도파가 기선을 제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88년 19차 당협의회에서 옐친이 다시 개혁의 가속화를 요구하면서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된다. 보수파도 페레스트로이카의 변질을 들어 반격을 시작한다. 고르바초프는 보수파와 급진파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한다.
그러나 보수파와 급진파는 70년간의 사회주의 건설의 성공과 과오, 자본주의 체제의 미래, 시장요소의 도입 폭과 속도, 신사고에 입각한 외교, 민족분리독립운동, 페레스트로이카의 당 주도 문제 등 사사건건 충돌한다.
급진개혁파는
결국 페레스트로이카를 넘어서는 노선으로 발전한다. 급진개혁파는
가장 효율적인 관리 통제 방식은 주식회사제도이면서 자본주의적 시장요소를 도입해서 상품과 화폐 관계를 매개로 시민사회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당제와 사유재산 및 완전한 자유시장경제 전환을 요구하게 된다.
고르바초프가 개혁노선을 지지하면서, 입지가 약화된 보수파 그로미코가
은퇴하고 리가초프는 이데올로기 책임자의 자리에서 물러나 한직인 농업 담당으로 옮겨간다. 반면 옐친은 89년 인민대위원 선거에서 지역구에서 압승을 거두고 화려하게 복귀한다. 인민대중들이
지지부진한 페레스트로이카에 실망하고 대안으로서 급진개혁파에게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다.
이념대립은 첨예화된다. 보수파는 러시아 공산당을 만들었고, 급진파는 주권선언을 한 러시아 공화국의 실권을 장악했다. 고르바초프는 제28차 당대회를 앞당겨 1990년 7월에 치르면서 중간파와 결탁해서 리가초프를 축출한다. 그리고 옐친 등 급진파는 탈당한다.
고르바초프는 당의 권력을 정부로 이양시켜 당을 약화시킨다. 공산당을 탈당한 급진파는 당외 투쟁에 나서고, 보수파는 소연방주의자들인 ‘소유즈(союз) 파’와 ‘러시아공산당’을 중심으로 개혁파를 압박한다. 보수파는 시장요소의 급속한 도입은
사회주의의 붕괴를 가져온다고 반대한 반면, 개혁주도파는 시장경제를 도입해야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있다고
찬성했다. 급진개혁파는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로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1989년 3월 소련에서는
연방 인민대의원 선거가 있었다. 러시아와 소련의 역사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치르는 자유경선이었다. 결과는 이변이었다. 무소불위의 공산당과 정부 고위간부들이 87명이나 낙선했다. 급진파의 약진이었다. 그리고 5월의 인민대의원 대회에서 고르바초프는 상설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된다. 이 같은 정부와 당의 분리는 공산당의 약화를 초래했다.
고르바초프의 아킬레스건 중 하나는 민족분리운동의 격화였다. 각 공화국들은 분리독립을 요구하고 나섰다. 우크라이나 쿠즈바스와 돈바스 탄전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었고, 그루지야와 발트 3국이 탈연방 독립운동에 나섰다. 동유럽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독일통일이 이뤄졌고, 루마니아 민중혁명이 일어났다. 고르바초프는 불간섭주의를 표방하고 관망한다. 소련의 힘이 무너지는 순간들이었다.
물론 실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르바초프
개혁에 있어 페레스트로이카와 함께 다른 한 축인, 신사고에 입각한 외교로 중소 화해와 냉전종식 선언이
나왔다. 그리고 1990년
9월30일 한소 외교관계도 수립된다. 여기에는 88서울올림픽의 성공이 기여했다는 후일담이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와 신사고 선언으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깨고 동유럽에 대한 불간섭을 표방해온 고르바초프는 89년에 “하나의 완벽한 사회주의 모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한 국가의 장래와 그 체제는 그 나라 국민들만이 정할 수 있다. 어느 나라고 타국의 국내상황에 간섭하거나 압력을 가해서는 안된다”라고 재확인한다.
결국 폴란드, 헝가리,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에서도 공산당이 퇴진하고 개혁파로 교체된다. 특히 스탈린적 통치방식을 고수하던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는 대중봉기로 무너지게 된다. 소련의 자진 무장해제는 결국 미소의 양극체제를 무너뜨리고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를 구축하는 요인이 된다.
90년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제 도입, 공산당의 권력독점 포기와 다당제 도입,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는 개헌안을 통과시킨다. 정부와 당은 분리되고, 강력한 대통령제가 채택된다. 그러나 옐친의 러시아 공화국은 소련 내 실세 공화국이 되고, 90년 3월 리투아니아가 독립선언을 한다.
러시아 공화국도 6월 주권선언을 하면서 모스크바에는 소련과 러시아 공화국의 이중권력 상태가 된다. 페레스트로이카의 핵심인 경제는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소연방의 해체 위기였다.
개혁주도파는 결국 시장요소를 대폭 도입한다. 그 결과 기업가들과 상인들, 글라스노스치로 돈의 맛을 안 저널리스트들, 작가, 예술가, 연예인, 학자 등 전문지식인 엘리트들 사이에 자본주의에 대한 호감이 상승하면서 시장경제의 도입을 부추겼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위한 종합기본계획에 합의한다. 급진개혁안인 샤탈린 안과 온건개혁파인 리슈코프 안 중 러시아 공화국은 샤탈린 안을 택하고, 소련 최고회의는 절충안인 고르바초프안을 채택하지만, 옐친은 11월 소련 최고회의를 무시하고 독자적 급진개혁을 추진한다. 러시아는 경제의 시장화와 기업의 사유화에 대한 과도한 환상을 갖는 듯했다.
90년 세계평화 정착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고르바초프는 국내에서는 오히려 급진파와 보수파 모두에게 포위당해 점점 영향력을 잃고 마침내 소련 대통령직에서 허망하게 물러나고 만다.
그에 앞서, 소련 공산당 보수파의 마지막 저항은 91년 8월 19일의 군부 쿠테타였다. 고르바초프가 와병으로 사임하고 전국에 6개월간 비상사태가 선포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모스크바 시내에는 전차와 장갑차가 진주했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전권을 장악했다는 담화문이 발표됐다.
8인의 비상사태위원회는 야나예프 부통령, 파블로프 총리,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1부의장, 크류츠코프 KGB의장, 야조프 국방장관, 푸고 내무장관,
스트로두부체프 농민연맹 위원장, 티지야코프 국가기업협의회장 등 온건 보수파의 결집이었다. 이들은 전날인 18일 크림반도 별장에 있던 고르바초프에게 비상사태선언
동조냐 사임이냐의 선택을 강요하고, 고르바초프는 거절하면서 별장에 감금된다.
이에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의 통제권을 자신이 장악한다고 선언하고, 불법 쿠테타에 대한 시민의 저항을 촉구했다.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으로 피신하고, 그의 지지자들이 결집해 모여들었다. 20일 80만 명이 참여하는 반쿠테타 시위가 전개되자, 군대 병사들조차 시위에 동조하고 나선다.
KGB 특수부대에 의사당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전차부대가 진격하지만, 인간사슬을 만들어 시민들이 저항하자 군대는 결국 진압을 포기한다. 21일
비상사태위원회 7인이 모스크바 탈출을 시도하고 푸고 내무장관이 자살하면서 쿠테타는 3일 천하로 막을 내린다. 고르바초프는 루츠코이 러시아 공화국 부통령의
호위 하에 모스크바로 복귀한다.
서방에서는 이 쿠테타를 ‘정말 기이한 쿠테타였다’고 평가했다. 준비도 엉성했고, 상황판단도
치밀하지 못했고 공산주의에 피로를 느끼는 대중들을 끌어들일 만한 프로그램도 없었다. 오히려 옐친을 대중적
영웅으로 만들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91년 들어서면서 경제위기가 심각해진다. 90년에는 이미 1920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게 된다. 국민들의 불만은 국가사회주의로 집중되었고, 또한 지지부진한 페레스트로이카에도 불만이 쌓이면서 급진개혁파에 기대를 걸었다. 8월 23일 옐친은 러시아 공산당의 활동정지 명령을 내렸고,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직을 사임하고 당 중앙위원회에 자진해산을 요구했다.
소련공산당은 해산했고 당의 자산은 국가에 몰수됐다. 12월 8일 슬라브계 세 공화국 지도자들이 민스크에 모여 독립국가연합(CIS) 협정에 조인하고, 소비에트 연방의 소멸을 선언했다. 21일에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타에서 11개국 지도자들이 만나 CIS 발족을 선언했다. 25일에는 소련기가 내려지고 러시아기가 크레믈린 궁에 휘날리게 된다.
체제전환으로 인한 혼란은 예상보다 컸다. 1992년-1993년의 물가가 166배로 오르는 인플레이션과 국내총생산의 절반 감소, 공업생산의 반토막, 실업자 2천만, 국민의 90%가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했다. 당시 러시아인들의 정치지향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관료적 획일주의와 중앙집권적 요소들을 배제한 '민주적 사회주의'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25-45%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국가사회주의도 10% 정도를 유지하며 전체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자본주의 지지는 20-30%였다. 나머지는 북유럽식 체제를 선호했다.
이제 러시아는 옐친식 자본주의 체제도 아니고 공산주의를 위한 사회주의 체제도 아닌, 러시아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것은 푸틴의 ‘위대한 러시아의 재건’이라는 꿈으로 대변되어 나타나고 있다. 아직도 실험 중인 미망의 꿈은 국제질서의 현실 속에서 부침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것은 향후 소련의 아류 국가인 북한의 현재와 미래를 관측하고 예측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언론대학 방송학 박사 수료
주요경력
-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대학 한국어과 강사
- '러시아의 소리' 한국어 방송부 아나운서
- KBS 라디오 방송작가
- KBS 모스크바 통신원
- '미국의 소리' 모스크바 통신원(필명 정여경으로 활동)
- 뉴스타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