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인력 양성과 활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적인 조치로는 병역특례제도가 있다. 정부는 1973년 3월 3일 ‘병역의무 특례규제에 관한 법’을 제정하여 고급 과학기술인력과 기능인력이 국가의 과학기술 연구기관, 방위산업체, 방산 연구기관 등 주요 기간산업체에 일정 기간 종사할 경우 병역의무를 면제해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법 제정 당시의 병역특례 대상으로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군수업체 및 연구기관, 그리고 공업, 광업, 건설업, 에너지 산업, 수산 및 해운업계의 주요 기간산업체에 종사하는 자와 학술・예술・체능특기자들로 한정했고, 복무기간은 5년으로 정했다.
이후 대상이 자연계 연구기관, 농촌지도요원, 해양경비함정 승선자 등으로 확대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축소되어 학술・예술・체능특기자, 농촌지도요원, 경비정 승선자 등이 폐지되고, 전문연구요원과 산업기능요원을 구분하는 등 수차례의 변경이 이루어졌다. 복무기간도 1992년에는 산업기능요원의 복무기간을 5년에서 3년으로 단축하고, 2003년 10월부터는 전문연구요원은 5년에서 4년으로, 산업기능요원은 3년에서 34개월로 단축하는 등 변화를 겪어오면서 현재(2015년)까지 유지되고 있다.
병역특례제도는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의 젊은 과학・산업기술인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방위력 확보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국가산업 발전과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한 제도이다. 이러한 공고 육성을 통한 기능인력 양성이 가능했던 또 다른 배경으로는 1968년 ‘7・15입시개혁안’을 통해 1971년까지 중학교 입학시험을 폐지하여 ‘중학교 무시험입학’ 제도를 도입하고, 이어서 1974년에는 ‘고교 평준화’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중학교 무시험 전형제’의 도입으로 중학교 진학 학생들이 3년 동안 59%에서 70%로 대폭 증가했다. 전국적으로 386개 중학교가 신설되었고, 기존의 중학교에 모두 5,230개 학급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중학교 무시험’ 제도는 교육의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학생 수의 양적인 증가를 가능하게 했고, ‘고교 평준화’ 제도는 우수한 학생들이 인문계 고등학교가 아닌 공업계 고등학교로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일반 고등학교의 경우 ‘후반기 추첨제’로 무작위 선발을 해야 하지만, 실업계 고등학교의 경우 ‘전반기 학교별 입시 제도’를 유지함으로써 우수한 학생을 선별적으로 선발할 수 있도록 했고, 장학금 등의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여 우수한 학생을 유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1970년대의 교육제도 변화는 중화학공업정책에 필요한 ‘규율된 노동력(disciplined labor force)’의 확보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기능공 양성의 결과와 그 의미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의 발전을 위해 전문기술자 양성이 절실할 때 때마침 필요했던 기술인력이 이렇게 양성되었다. 이들 공업고등학교에서는 매년 약 5만~6만 명 이상의 기능공들이 배출되었다. 이는 박 대통령이 원했던 ‘매년 기술자 5만 명 양성’과거의 일치한다. 호주국립대 김형아 교수는 “1972년부터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던 1987년까지 순수한 공고 출신은 77만 명가량 되며, 이들 외에 공고 출신보다는 기술수준이 다소 낮기는 하지만 약 100만 명이 넘는 직업훈련원 출신 기능인력이 기능공 대열에 가세했다.
1970년부터 추산할 경우 1987년까지 대략 200만 명의 기능공들이 탄생했는데, 그중에서 직업훈련을 통한 기능공은 120만 명, 공고 출신은 80만 명 가량 된다. 200만 명 중 대략 절반가량인 100만 명이 중화학공업을 일구어낸 기능공인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형아 교수는 이들 기능공의 존재에 대해서 “외국 학자들은 한국 같은 자그마한 나라에서 중화학공업을 성공시키고 산업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자들이 많이 필요한데 그들이 누구이며, 도대체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부터 던집니다. 대한민국 중화학공업 성공사는 이들 기능공들의 존재와 실력이 웅변합니다”라고 했다.
또한 류석춘・김형아 교수는 중화학공업 발전에 있어서 기능공의 역할에 대해 “이들이야말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체계적으로 기술을 습득하고 노동시장으로 진입한 1세대 기능공 혹은 산업노동자 집단이다. 당시 정부는 이들을 ‘산업전사’ 혹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 부르며 엄청난 역사적 사명감을 불어넣었고, 이들의 교육을 위한 재정적 투자 또한 아끼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자랑하던 ‘공업 한국(Industrized Korea)’의 신화는 이 같은 기능공 대량 양산 시스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고,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유신체제였다”고 김형아 교수는 지적한다.
김형아 교수는 “박정희 정권을 두둔하거나 정당화하는 차원을 떠나 학문적으로 순수하게 유신체제 같은 어마어마한 독재 시스템 없이 한국의 중화학공업 혁명이 가능했겠느냐고 묻는다면 그 당시로서는 전혀 불가능했다는 게 나의 답”이라며 “민주적 방식으로 인권을 챙기면서는 목표 달성이 전혀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군대식・병영식으로 기능공들을 키워냈다는 게 아이러니이고 비극이었다. 내 책의 제목인 ‘양날의 선택’도 그런 의미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사실 중화학공업이라는 용어 자체가 미국을 안심시키기 위한 일종의 포장이었고, 기능공을 대량 생산했던 궁극적 이유도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의 육성에 있었다는 게 김형아 교수의 지적이다. 이들 100만 기능공의 핵심이었던 엘리트 공고 출신 77만 명은 전부가 남성이었다.
김형아 교수는 “이들은 진짜 산업전사(Industrial Army)였고 실제로 산업병영 같은 학교체제에서 군대식으로 키워졌다”고 말했다. 예컨대 금오공고의 경우 군인 출신들이 교장으로 근무했고, 학생들은 군인처럼 교육을 받았다. 김형아 교수는 “금오공고 출신들을 인터뷰해보면 그들은 사실상 군대생활을 8년간 했다고 토로한다”고 말했다. 3년간의 군대 같은 학교생활에 이어 기술하사관(RNTC)으로 5년을 더 근무해야 했던 현실을 지적한 말이다.
엘리트 공고 출신들은 ‘대한민국의 머슴’이었다. “이 기능공들이 없었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우리 사회의 주류(main stream) 그룹입니다. 이 기능공들의 공
적과 시대적 역할 그리고 그들의 희생을 한국 사회는 인정해줘야 합니다.” 김형아 교수는 또한 “노동학자들이나 대한민국 산업혁명에 대한 연구들은 우리 노동자들을 유신정책 밑에서 억압을 받은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걸로는 대한민국 산업혁명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유광호 박사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와 비슷한 문제를 제기했다. “기존의연구들은 이 중화학공업 부문의 기능공들이 대부분 ‘반숙련 노동자’로서 ‘저임금 착취’를 당했으며 ‘프롤레타리아화’되었다고 서술해왔다. 그런 상태라면 한국과 같은 발전국가가 어떻게 중화학공업화에 성공하여 강대국형의 산업구조를 구축하고 선진국의 문턱에까지 상승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그는 “대학 진학의 좁은 문을 뚫을 수 없거나 가난하여 학업을 단념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농촌 중간층 이하 출신의 젊은이들이 숙련기술 획득과 중화학공업에 취업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여자 기능공 중심의 경공업 단계에서는 번듯한 일자리가 없어서 퇴적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전 시기와는 매우 다른 기회구조가 생긴 셈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중화학공업화와 방위산업의 상징적 기업이었던 (주)풍산의 안강 종합탄약공장의 기능공들을 사례로 들며 그 기능공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착취받는 계층이 아니라 중산층 진입에 성공한 세대가 되었는지를 분석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한국 중화학공업화는 ‘기능공, 발전국가, 기업의 규율’의 합작품이었다. 한국 중화학공업화의 세 주체인 국가, 기능공, 기업은 상호 배태되고 완성적 동기로 ‘일반화된 호혜성’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는 기능공에게 숙련 형성과 병역 특전을 주었고, 기능공은 기업에게 농촌 중간층의 윤리인 인내와 협동, 규율된 노동과 노사협조를 제공했으며, 기업은 국가에게 기업의 전문화와 온정주의 경영으로 국가의 규율에 호응했다. 또한 기능공은 국가에게 산업역군으로서 국가의 비전에 동의했고, 국가는 기업에 정책적 지원과 숙련된 병역특례병을 제공했으며, 기업은 대신에 기능공에게 고용안정과 임금 상승으로 보답했다.
그 결과가 기능공의 중산층화였고, 기업의 세계적 전문기업으로의 성장이었으며, 중화학공업화 달성으로 인한 발전국가의 성공이었다. 이것을 ‘규율적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러한 규율적 발전이 남미와 같이 노동과 자본 간의 계급투쟁이나 노자(勞資) 간의 야합으로 공익과 국익을 약탈하는 것을 방지해주었다는 것이다.”